더경남뉴스는 경남과 부산, 울산 곳곳에서 역사의 켜를 지니고 있는 문화재를 찾아 그 흔적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소개합니다. 많은 애독을 바랍니다. 편집자 주
가호서원(佳湖書院)은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길에 있습니다. 진주 시내에서 동쪽인 창원으로 가다보면 문산읍, 진성면에 이어 일반성면, 이반성면이 차례로 나옵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일어난 전투 '북관대첩(北關大捷)'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충의공 정문부(鄭文孚·1565~1624년) 장군을 모시는 서원입니다. 정문부 장군의 위패(位牌·죽은 사람 이름을 적은 나무 패)가 봉안돼 있는 곳이지요.
북관대첩이란 의병장 정문부 장군이 1592~1593년 함경도 길주(吉州), 경성(鏡城) 등지에서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 반역자 국경인, 여진족을 모두 물리쳐 함경도 지역을 완전히 탈환한 전투입니다.
이곳에는 가호서원(신구 건물 2개), 충의사(忠義祠), 정문부 장군 사적비, 북관대첩비, 유물전시관, 동재(東齋·동쪽 유생 거처), 장판각(藏板閣·책 찍는 목판 보관), 부조묘(不祧廟·정문부 장군을 모신 사당) 등이 있습니다.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에 있는 가호서원 전경. (1)신 가호서원 (2)충의사 (3)구 가호서원 (4)정문부 장군 사적비 (5)북관대첩비 (6)유물전시관(전시관 앞 건물은 동재) (7)장판각 (8)부조묘. 번호는 없지만 부조묘 앞 한옥은 종택과 사랑채. 맨 왼쪽 위편 큰 한옥은 진주로 내려온 정문부 장군의 두 아들과 동생의 신위를 모신 삼덕재.
이 가운데 구 가호서원과 충의사는 경남도문화재자료 제61호(1983년 7월), 정문부 농포집 목판(191매 372장)은 경남도유형문화재 제567호(2015년 1월), 농포 문중 고문서 123점은 경남도유형문화재 제615호로 등록돼 있습니다.
진주시 이반성면 가호서원 위치도. 네이버 지도
북관대첩(北關大捷)은 백탑교 전투, 경성 전투 등 6개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끈 전투입니다. 북관(北關)은 함경도, 대첩(大捷)은 큰 승리를 말합니다.
정문부 장군의 신위(神位)가 진주에 모셔진 데는 깊은 연유가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말년에 시화(詩禍·시로 인한 화근)에 연루됐고 고문을 받다가 끝내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가솔(家率·집안 사람)에게 "다시는 벼슬을 하지 말고 진주에 터전을 잡고 살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정문부 장군이 진주 땅을 후손들의 삶의 터전으로 택한 것은 50대 중반에 인근 창원에서 2년간 부사로 있을 때 진주를 자주 찾았는데 빼어난 자연경관과 후덕한 인심에 끌렸기 때문이었다고 전합니다.
이에 장남 정대영(鄭大榮), 차남 정대륭(鄭大隆)은 정문부 장군 동생인 용강공 정문익(鄭文益)과 함께 충의공 정 장군이 사망한 다음 해인 1625년 2월, 양주 송산(지금의 경기 의정부시) 선영에 장사를 지낸 뒤 상복을 입은 채 가족을 데리고 진주로 내려왔습니다.
가호서원 정기민 논어학교 교장은 더경남뉴스에 "큰아들 자손은 까꼬실에, 둘째 아들 자손은 이반성에, 동생의 자손은 산청군 덕산으로 와 400년 가까이 살면서 이들 지역에서 세거(世居·한 고장에 대대로 삶)했다"고 전했습니다.
장남 자손들이 자리를 잡은 진주시 귀곡동(까꼬실)은 남강댐 축조로 진양호가 생기면서 지금은 마을이 물에 잠겼지만 주위 경치가 뛰어났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정 교장은 "충의공이 창원부사로 있을 때 진주성 촉석루 등 진주에 자주 들러 정을 붙였다"며 "당시 촉석루 중수를 기념한 시를 썼는데, 이 시는 지금도 촉석루에 걸려 있다"고 했습니다.
이후 진주를 중심으로 한 지금의 해주 정씨는 농포공파(시조 정문부)와 용강공파(시조 정문익)로 나눠져 살고 있답니다. 농포는 충의공 정문부 장군, 용강은 동생 정문익 선생의 호입니다.
다만 1969년 남강댐이 축조되면서 까꼬실에 있던 충의공의 종가와 불천위(不遷位·덕망 있는 유학자에게 주어진 서훈) 사당은 진주시 이현동으로 옮겨졌고 그 외의 후손들은 전국에 뿔뿔이 흩어졌다고 합니다.
가호서원은 1970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진주향교 관계자들의 공의(公義·의로운 도의)와 후손들의 협찬으로 짓게 됐고 1973년 완공됐습니다. 서원 이름인 가호(佳湖)는 아름다울 가(佳), 호수 호(湖)로 까꼬실마을 옆 진양호의 아름다운 호수를 뜻합니다.
정 교장은 "가호서원은 1970년대에 충의공의 종가와 불천위 사당이 있던 자리에 지었고, 이곳에 충의공을 모시다가 20년 후 댐을 높이면서 가호서원 자리이 물에 잠기게 되자 둘째 아들 자손의 세거지인 이반성으로 옮기면서 종가와 불천위 사당을 건립했다"고 전했습니다.
이전엔 함경북도에 있는 4개의 사우에서 향사(享祀·음식을 올리고 넋을 기림)를 했었답니다.
가호서원 내 건물 중 까꼬실에서 옮긴 건물은 ▲가호서원 현판이 걸린 외삼문(주 출입문) ▲충의사 및 내삼문(출입문) ▲구 가호서원 ▲정문부 장군 사적비 ▲동재(東齋·유생이 거처하는 동쪽 집) 등입니다.
이후 가호서원 내에 정문부 장군의 유물전시관 등의 건물이 하나 둘씩 건립됐습니다.
가호서원 입구와 전경. 한국관광공사
가호서원 입구 오른쪽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편에 자리한 북관대첩비. 정면 가운데에 보이는 작은 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정면 건물은 새로 지은 가호서원이다.
이어 정문부 선생의 일생을 소상히 알아봅니다.
옛 한자가 많아 한자의 풀이는 중복해 넣습니다. 한글로 풀어 쓸 수는 있지만 당시 상황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한자는 그대로 쓰되 풀이를 반복해 더 쉽게 이해하는 차원입니다.
또 호칭은 '장군'과 '선생'을 혼용합니다. 이유는 신주를 비롯한 여러 곳에 선생으로 표기돼 있어 선생으로 쓰는 게 맞다고 보지만 의병장 등의 직에서는 장군으로 쓰는 게 문장을 이해하는데 좋을 듯합니다.
정문부 선생(1565~1624년)은 조선시대 중기 문신이며 의병장으로 활동했습니다. 호는 농포(農圃)이고 충의공(忠毅公)은 나라에서 내린 시호(諡號·죽은 뒤 공덕을 칭송해 붙인 이름)입니다.
선조 18년(1585년), 20세에 생원이 된 뒤 함경북도 병마평사(병마절도사의 보좌관·정6품 외직 무관)가 되어 북변(北邊·함경북도 변두리)의 여러 진(陣·군대가 위치하는 곳)을 순찰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조직해 장덕산 전투, 쌍포 전투, 백탑교 전투 등 6개 전투에서 대승해 관북(關北) 지방, 즉 함경도 지방을 수복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시화(詩禍·시로 인한 화)에 연루돼 죽임을 당했습니다. 후에 복권돼 좌찬성(左贊成·종 1품)에 추증(追贈·품계를 줌)됐다고 하네요. 저서로는 '농포집'이 있습니다.
봉안하는 위패인 봉안위(奉安位)는 '충의공 농포 정 선생(忠毅公 農圃 鄭先生)'입니다. 상향(尙饗·축문 맨 뒤에 쓰는 글)에는 '경천욕일(擎天浴日) 위진훼복(威振𠦄服) 덕피생민(德被生民) 공존사직(功存社稷)'이란 글이 적혀 있습니다.
대제(大祭)를 지내고 난 뒤 손님들에게 잔치를 벌이는 향례(享禮)는 지역 유림이 주관하며 양력 5월 첫 주 일요일에 합니다.
■가호서원을 분야별로 소개합니다.
▶가호서원
가호서원으로 불리는 한옥은 두 개 있습니다.
지은 지 오래된 구 가호서원은 지난 1983년 7월 경남도문화재자료 제61호로 지정돼 도 차원에서 관리되고 있습니다.
새로 지은 가호서원은 각종 교육을 하는 강당 역할을 합니다. 지금은 문화 행사로 논어학교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가호서원 모습. 강당으로 활용하는 새로 지은 가호서원은 경내 왼쪽에 있다.
구 가호서원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습니다. 지붕은 팔작(八作)으로,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양 옆에는 각 2칸의 방을 배치했습니다.
팔작(八作)지붕이란 지붕 위의 절반은 박공(牔栱)지붕으로 돼 있고,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지붕입니다. 박공은 옆면 지붕 끝머리에 '∧' 모양으로 붙여 놓은 두꺼운 널빤지를 말합니다.
구 가호서원. 이곳에선 음악회 등 행사가 간간이 열린다.
가호서원 역사를 기록한 '가호서원기'
▶농포 정문부는?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1565~1624년)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입니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입니다.
농포 정문부 선생의 초상화
선조 18년(1585년) 약관(弱冠)인 20세에 생원(生員·지방에서 치러지는 소과)에 합격하고, 3년 후인 1588년 식년문과(式年文科·3년마다 돌아오는 식년에 치르는 과거시험) 갑과에 급제해 한성부참군이 되었습니다.
이어 1590년엔 사헌부 지평(정5품)으로 지제교를 겸했으며, 다음 해 함경북도 병마평사(병마절도사의 보좌관·정6품 외직 무관)에 임명돼 북변의 진(鎭)들을 순찰했습니다.
2년 후 1592년 관내 행영(行營·진영 순찰)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북평사(北評事)로 의병대장에 추대돼 함경도를 침략한 왜군을 물리치고 지방 반군 소탕, 북방 호족 격퇴 등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북관대첩(北關大捷)을 이루었습니다.
함경북도 북부인 회령 지방의 반민(叛民·반란을 일으킨 백성)인 국경인(鞠景仁)이,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두 왕자를 호종(扈從·임금이 탄 수레 호위)하던 김귀영(金貴榮)·황정욱(黃廷彧)·황혁(黃赫) 등을 왜장 가토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 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 경원부사 오응태(吳鷹台), 각 진의 수장(守將)·조사(朝士)들과 합세해 의병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먼저 명천·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장덕산(長德山)에서 싸워 크게 승리하고, 쌍포(雙浦) 전투와 이듬해의 백탑교(白塔郊) 전투에서 대승해 관북 지방을 완전히 수복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잠시 잦아들던 1594년 함북 영흥부사에 이어 온성부사·길주목사·안변부사·공주목사를 차례로 거친 뒤 1599년 장례원판결사, 호조 참의(판서 보좌·정3품)가 되었고 그 해 중시(重試·당하관 대상) 문과에 장원급제 했습니다. 이에 정2품 당상관이 됐습니다.
1600년에는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다음 해 예조 참판, 이어 장단부사·안주목사가 됐고 1612년 형조 참판에 임명됐습니다. 하지만 부임하지 않고 외직을 자청했습니다.
이어 1615년 부총관에 임명되고 다시 병조 참판이 됐으나 사색당파의 하나였던 북인(北人)의 난정(亂政)을 통탄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1623년 '인조반정'(서인들이 1623년 반란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쫓은 사건)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전주부윤이 되고, 다음 해 다시 부총관에 임명됐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문부 선생은 임진왜란 때의 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시화(詩禍·시로 인한 화)에 연루돼 역모죄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후에 신원(伸冤·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돼 3정승 바로 밑인 좌찬성(左贊成)에 추증(품계를 줌) 되었습니다.
시호(諡號·죽은 뒤 붙여준 이름)는 충의(忠毅)입니다. 경성의 창렬사(彰烈祠), 함경도 부령의 청암사(靑巖寺)에 배향돼 있습니다.
저서로는 '농포집'이 있습니다.
▶충의사(忠義祠)
조선시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祠堂)입니다. 충의(忠毅)는 시호이고, 사당의 명칭은 옳을 의(義)자를 넣은 충의사(忠義祠)입니다.
충의사 모습
사당은 3개 문을 갖추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일자형 홑집 평면에 알맞는 지붕)의 목조기왓집입니다.
경내(境內)에는 충의공의 일대기와 유물을 전시한 정문부 선생 유물전시관, 농포집 책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藏板閣), 강당(講堂) 등의 부속 건물이 있습니다.
원래는 진주시 귀곡동(까꼬실)에 있던 것을 남강댐 숭상공사(높임 공사)로 인해 1995년 이곳으로 이전해 건립했습니다.
현재 충의사는 해주 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1983년 7월 20일 경남도문화재자료 제61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정문부 선생을 모신 사당으로는 북한에 창렬사(어랑군), 현충사(길주군), 청암사(일명 숭렬사·부령군), 모의사(경성군) 등이 있다고 합니다.
후손들이 이주해 살던 까꼬실에는 먼저 종가와 부조묘 사당이 있었는데 1970년 가호서원 건립 공사를 시작할 때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충의사'라는 편액(扁額·종이나 비단, 널빤지에 그림이나 글씨를 넣어 걸어 놓는 틀)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진주시에는 여러 서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에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한 서원은 남악사원, 광제서원, 대각서원, 가호서원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문부 선생의 업적과 함께 후손인 정민섭 작곡가가 워낙 유명해 이곳에서 예술 행사가 주기적으로 열리는 등 점점 많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가문이나 개인 서원도 나라로부터 서원 현판 액자를 하사받거나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문부 사적비
정문부 선생의 사적(事跡)을 기록해 놓은 비입니다.
비문의 내용은 1980년 3월 마산 출신으로 가곡 '가고파'를 작사해 유명한 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이 썼습니다.
농포 정문부 사적비(事跡碑)
노산 이은상 시인이 쓴 비문 내용
세로로 적혀 있어 젊은층에선 다소 생소할 듯해 가로로 써 풀이합니다.
'세상에 적은 공으로 상을 받는 이도 있으되 큰 공을 세우고도 댓가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박해로 슬픈 최후를 마친 이가 계시니 문무 겸전한 농포 정문부 선생이 바로 그 이시다. 공은 일찍 명종 20년 2월 19일에 나시어 27세에 함경북도 병마평사에 임명되어 나가 이듬해 28세 때에 임진란을 만났던 것이다.
그때 내란을 일으킨 반역자들을 소탕하는 한편 북으로 쳐들어간 억센 왜적들과도 싸워야 했고 또 틈을 타 침구하는 오랑캐들까지 무찔렀었다. 황막한 변방에 깃발을 꼿고 바람같이 달리면서 같은 때에 한 칼을 들고 삼중전투를 감해아여 모두 대승첩을 거두었으니 어찌 그리 장하던고. 임진란이 끝나고 광해군 시대에는 숨어 살다가 인조때 원수의 지위에 추천되기까지 하였으나 어머님을 봉양하기 위해 전주부윤으로 나갔더니 일찍 역사를 읊는 시 한 장으로 모함을 입어 옥에 갇히어 모진 고문 아래서 숨을 거두시니 인조 2년 11월 19일이었고 향년은 60세, 원통한 공의 죽음을 무슨 말로 위로할 것이랴.
몸은 그같이 가셨지만은 공로는 숨길 수 없어 숙종 때 충의의 시호를 내려 보답해 드렸었다. 농포 정공이야 말로 국경 수호의 3대 영웅이라 정부는 후손 세거지인 이곳에 사당을 중건하고 공을 추모하며 공의 행적을 적어 비를 세운다.
1980년3월 노산 이은상 짓고 고천 배재식 쓰다.
▶북관대첩비
임진왜란(1592~1598년)때 이봉수·최배천·지달원·강문우 등 의병들이 북평사 정문부 장군을 의병장으로 추대해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길주, 백탑교 등지에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을 격파한 북관대첩(1592~1593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던 승전비입니다.
정문부 장군 유물전시관에 있는 북관대첩비
정문부 장군은 역모(逆謀·반역 모의) 사건에 연루돼 참혹하게 숨졌지만 사후 43년 만에 억울함이 밝혀지며 그의 전시 공적도 드러납니다. 이어 사후 85년인 1708년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고을 주민들이 뜻을 모으고, 함경도 북평사인 최창대가 글을 짓고 이명필이 써 비를 건립했다고 합니다.
한참 이후 러·일전쟁(1904년 2월 8일~1905년 9월 5일) 중 이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 제2예비사단의 이게다마사스케 소장이 자기 조상들의 패전 기록을 보고 기분 나빠해 이 비를 일본으로 가져갔고 그 뒤에 일본 황실에서 보관하다 야스쿠니신사로 옮겨졌습니다.
이어 2005년 6월 남북한이 비를 돌려받자고 합의하고, 일본 정부에 요청해 그 해 10월 20일 비를 반환 받았습니다.
반환 당시 비의 몸돌(높이 187㎝, 너비 66㎝, 두께 13㎝)만 남아있었지만 비 해체 때 나온 도면을 기초로 받침돌과 지붕돌을 복원했습니다.
새로 건립한 북관대첩비. 국내 최초(원형)의 북관대첩비는 유물전시관에 보관돼 있다.
한편 북관대첩비 원본은 함경북도 길주군에 있고 북한 국보 제193호 지정돼 있습니다.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이 비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비문을 탁본(拓本·돌, 금속 등에 새겨진 글자나 문양을 종이에 그대로 떠서 사본을 만드는 것)한 뒤 복제한 비를 제작, 독립기념관과 고궁박물관, 경기 의정부시 정문부 선생 산소, 이반성면 충의사 경내에 둬 모두 4점이 국내에 있습니다.
▶유물전시관
유물전시관은 정문부 선생의 유품과 일대기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한 곳입니다. 가호서원을 남강댐 숭상공사(댐 둑을 높이는 공사) 로 수몰지가 된 진주시 귀곡동에서 지난 1995년 이곳으로 옮겨온 2년 후인 1997년 만들었습니다.
선생의 의병 활동상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북관대첩의 모형과 영상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유물전시관 건물
전시관 내 전시물들
▶장판각
정문부 선생의 문집인 '농포집' 목판(경남도유형문화재 제567호 1750~1758년 제작)을 191매, 372장을 보관하기 위해 1997년 현 위치에 건축됐습니다.
장판각 목조 건물. 합천해인사 팔만대장경 보관 형식과 비슷하다.
농포집 목판(木版). 경남도유형문화재 제567호. 수량은 191매 372장이다.
농포집은 정문부 선생의 호를 딴 문집으로 7권 4책의 목활자본입니다.
책의 크기는 가로 21.2㎝, 세로 31.4㎝이고 반곽(半郭)의 크기는 가로 15.6㎝, 세로 22㎝ 입니다.
광곽(匡郭·책장의 사주(四周)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선)의 사방은 굵은 한 줄로 처리돼 있으며 행간에 계선(界線·경계선)이 있고, 판심(版心·옛 책의 책장 가운데를 접어 양면으로 나눌 때에 접힌 가운데 부분)에는 대체로 책의 상하에 화문어미(花紋魚尾·고기 꼬리와 같은 어미에 있는 꽃잎 문양)가 있습니다.
책의 반인 반곽은 10행으로 돼 있으며, 각 행에는 22자씩 들어있습니다. 주석은 소자쌍행(小字雙行)입니다. 소자쌍행은 고서에서 주(註) 표시를 할 때 본문 사이에 소자(小字) 두 행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규장각에는 여러 본의 '농포집'이 소장돼 있는데 ▲'奎1672'본 ▲'古 3428-114'본 ▲'一慕 古 819.53-1464n v.1-5'본은 이때 간행된 중간본입니다. 이 가운데 '一慕 古 819.53-1464n v.1-5'은 제2책만 남아 있는 영본(零本·한 질을 이룬 여러 권의 책 중에서 빠진 권이 있는 책)입니다.
▶부조묘(不祧廟)
부조지전(不祧之典·)은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손(胄孫·장손자)으로 하여금 영원히 제사를 모시도록 한 사당입니다. 주손(胄孫)이란 한자는 자손 주(胄), 손자 손(孫)으로 '둘 이상의 손자 가운데 맏이 손자'를 말합니다.
부조묘(不祧廟)를 한자로 해석하면 아닐 불(不), 조묘 조(祧), 사당 묘(廟)인데 조묘(祧廟)란 '선조의 사당'을 이릅니다.
부조묘는 4대조까지의 조상은 집안 등에 사당을 만들어 모시는데,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우고 숨지거나 하면 대에 상관없이 모시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문부 선생의 종가(宗家)와 부조지전은 원래 남강댐을 만들면서 물에 잠긴 귀곡동(까꼬실)에 있었습니다.
종가와 부조지전은 1969년 남강댐이 완공돼 진양호가 만들어지면서 진주시 이현동으로 옮겼었습니다. 하지만 1997년 남강댐 숭상공사로 가호서원 자리마저 물에 잠기게 되자 가호서원을 이반성으로 이전하면서 종가와 부조지전도 옮겨왔습니다.
▶가호서원 논어학교(論語學校), 문화행사 등
이곳에서는 주기적으로 행사들이 열립니다. 경남도문화재자료 제61호인 충의사와 가호서원에서 개최되는 프로그램들이지요.
주요 행사는 ▲서원의 향사(享祀)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가호서원 1박2일' ▲논어(論語)와 인문학 강좌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가호서원 논어학교' ▲서원의 가을밤을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하는 '가호서원 음악회' 등이 있습니다.
이들 행사는 국가유산청의 '살아 숨쉬는 향교·서원 문화재(국가유산) 활용사업' 지원으로 열리는데, 향교·서원과 연관된 유적·유물과 이야기 등 내재된 가치를 현대적으로 재창조해 지속가능한 역사문화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한국 문화재의 가치 재발견, 인문정신 계승 발전, 청소년 인성 교육의 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호서원에서 향사(享祀)를 하고 있다. '가호서원 1박2일' 프로그램은 서원의 향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가호서원 논어학교'는 논어(論語)와 인문학 강좌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가호서원 음악회' 모습
대표적으로 가호서원 논어학교가 운영됩니다. 올해로 10년째 정부의 공모 사업에 선정돼 특색 있게 발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또 '정민섭 음악제'가 해마다 열립니다.
사연은 더 세세하게 소개합니다.
지난 10월 19일 밤 충의사 안에 있는 한옥 가호서원에서 3번째 정민섭 음악제가 열렸습니다. '향교·서원 국가유산 활용사업'인 이 음악제는 국가유산청, 경남도, 진주시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가호서원 논어학교가 주관했습니다.
작곡가 정민섭 선생은 정문부 선생의 후손이자 진주 출신인 유명 작곡가입니다. 이 음악제는 정민섭 선생의 음악을 널리 알리면서 선생의 음악을 매개로 선조들의 정신을 배우고 계승하려는 취지로 마련됐습니다.
가을비가 촉촉히 내리던 10월 어느 날, 정민섭음악제에 공연하는 모습
올해 음악제에서는 정여진(정민섭의 딸), 정재윤(정민섭의 아들), 나오미(정민섭의 며느리), 하지하, 정현(제니스), 정유나, 오지민, 포크듀엣(궁시렁)이 출연해 정민섭 선생의 작품인 대중가요와 만화 주제가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였습니다.
작곡가 정민섭 선생은 1966년 '뜨거워서 싫어요'로 가요대상을 받았고 '곡예사의 첫 사랑'으로 국제가요제에서 입상했습니다.
그가 작곡한 주옥 같은 노래는 수없이 많습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아니 벌써', '목석같은 사나이', '육군 김일병', '여자가 더 좋아', '무교동 이야기', '고향 아줌마' 등을 작곡했습니다. 가수 김상희의 '대머리 총각', 김상진 '이정표 없는 거리', 김인순 '여고 졸업반', 차중락의 '낙엽따라 가 버린 사랑' 등은 요즘도 불려져 잘 알려져 있지요.
또 어린이 대상 동요도 많이 작곡했습니다.
'태권 동자 마루치', '미래 소년 코란', '개구리 왕눈이', '빨간 머리 앤', '호호 아줌마', '요술 공주 밍키' 등인데 지금의 중년들이 어릴 때 많이 불렀던 동요이지요. 지금까지 기억되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 행사는 정민섭 선생의 음악과 충의공 정문부 장군, 가호서원을 더 이해할 수 있는 부대 행사입니다.
앞선 소개 글을 보면 지금의 시대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많습니다. 따라서 내용이 생소합니다.
다음 가호서원 논어학교장의 인사말을 읽으면 보다 더 쉽게 이해가 될 듯해 소개합니다.
■가호서원 논어학교장 인사말(가호서원 누리집)
조선 중기 이래, 교육(敎育)·학문(學問)·문화(文化)의 중심이었던 서원(書院)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서원에 대한 이해가 지역의 학문과 문화의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최근 전문적인 서원 활성화 움직임은 그 무엇보다 의미가 깊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어 조선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의병장인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선조를 모신 충의사(忠義祠)와 가호서원(佳湖書院)에서 '가호서원 논어학교(佳湖書院 論語學校)'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의 '살아 숨쉬는 향교·서원 문화재 활용사업'의 확산은 물론 서원(書院)이라는 창(窓)을 통해 시대에 몰비춤된 인문정신과 선현들의 유업(遺業)을 확인하고 실천해 나가는데 작으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가호서원 논어학교가 마련한 서원(書院)의 향사(享祀·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나타내는 의식)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가호서원 1박2일'과 논어(論語)와 인문학 강좌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가호서원 논어학교', 서원의 가을밤을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하는 '문화 행사'는 서원 문화재의 가치 재발견, 인문정신 계승발전, 청소년 인성 교육의 장이 될 것입니다.
특히 가호서원 논어학교는 성인을 주대상으로 하는 평생교육의 기능보다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순수한 '참교육'적인 기능을 강화해 서원 본래의 역할에 다가설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가호서원이 교육·학문·문화·역사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창(窓)과 문(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가호서원 논어학교 교장 정기민.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길 59-2.
연락처 055-741-6666. HP. 010-2248-0260, 010-3869-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