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감옥 갔으니, 이재명도 아웃시켜야지!"
기자는 윤석열 대통령이 공수처에서 조사를 받고 있던 15일 저녁 해장국집에서 막걸리 한 잔을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주인 양반이 틀어놓은 TV의 뉴스를 듣던 중 한쪽 옆좌석에 있던 30대로 보이는 손님의 말에 귀가 번쩍했다.
"윤석열 감옥 가네, 김건희도 보내고. 이재명도 잘 한 게 없어. 아웃시키고···"
간단했다. 와닿았다.
한 줄밖에 안 되는 저 말처럼 대한의 국민은 2년 반을 이들에게 인질처럼 잡혀 살아왔다.
기자가 젊은 손님이 한 말과 비슷한 말을 들은 건 처음이 아니다. 자주 들었다. 기자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독자들의 생각도 비슷하지 않을까 짐작한다. 이 비정한 세태에 서로 말 문을 닫고 지냈던 것이다
"여론은 새 정치를 찾구나", "미래 정치를 애타게 꿈꾸는구나"라는 생각이 밥 먹는 내내 상념으로 자리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념의 골'에 의한 상처가 너무 깊게 패어 있다. 좌우 이념에다 개인의 감정까지 실려 흉기만 들지 않았지 저마다 '날카로운 말의 칼'을 지니고 있다.
요새 좌중에는 정치 언쟁조차 보기 어려워졌다. 술좌석엔 정치 이야기가 없어졌다. 최근 몇 년 새 더해졌다.
왕조 때도 민초들은 주막집 주모가 따르는 농주 몇 사발에 취기가 돌면 임금 욕을 입에 오르내렸다. 팍팍한 삶을 임금 탓으로 돌리며 화를 푼다. 응어리지면 홧병이 되니까··.
나랏일과 백성의 삶은 밀접하다. 하지만 저잣거리에 이 같은 '주막집 넋두리'가 싹 사라졌다.
가벼운 말로 터치하는 정치 이야기가 흉기가 될 공산이 커진 세상이다. 괜시리 끄집어냈다가 흉기에라도 맞을까 겁이 덜컥 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을까? 해방 직후?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때?
정확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다 맞다. 시대마다 좌우 이념으로 극한 대립이 있었던 것만은 기정사실이니까.
근자의 비슷한 분위기는 문재인 정권 초기였다. 적폐청산이란 단어가 살벌하게 난무할 때 "말조심"이 인사처럼 오갔다. 다섯 손가락 이상의 고위직들이 자살을 택했다. 당시 자살한 전임 대통령의 한을 푸는 것이란 말이 횡행했다. 이들 장면은 한동안, 제법 길게 지속됐다.
요즘 저잣거리 분위기는 그때보다 더한 듯하다. 아예 '정치의 말'이 사라져 버렸다. 독재시대 법이 이 정도로 통제를 할 수 있을까 싶다. 놀라고 그리고 서글프다.
정치 정(政), 다스릴 치(治), 즉 정사를 다스린다는 이 좋은, 민초들이 기대고 싶은 이 말이 금기어가 돼버렸다.
이유는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상식을 바탕으로 한 세상의 기준이 없는 땅이 돼 있다. 학교 교과에서 배웠던 '옳고 그름'이 없어졌다. 나에게, 우리에게 '맞나 안 맞나'만 앙상하게 남았다. 상식의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더 무섭게 엄습하는 건 이에 따른 '무관심'이다.
지금의 세태는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관심이 너무 많아 이해 충돌 우려로 입을 닫아 무관심처럼 보인다. 내면을 들여다 보면 그 심각성은 더하다. '방구석 히키코모리나' '방구석 여포'가 득실득실하다는 말이다.
달리 젊은층에선 정치 무관심층이 뚜렷하게 형성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또한 비정상이다.
시중에 도는 '식당의 방송 채널' 우스개가 있다.
식당에 들어서 켜놓은 TV 방송을 보면 그 집 주인과 서빙하는 이의 이념 성향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특정 지역, 특정 성향의 주인은 특정 방송을 틀어놓는다는 말이다.
별 생각없이 '돌리면 되는' TV 채널에서마저도 저런 살벌한 이해 관계가 콘크리트처럼 스며들어 있다니 이미 최극단의 사회가 된 상태다.
국민의 방송인 KBS마저 좌우 이념이 깊게 침투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혼란을 겪고 있지 않은가? 이에 공정한 시각으로 보려면 '민간 방송'을 보란 말까지 나온다.
'웃픈' 현실이다.
이 살벌한 세상을 누가 만들었나?
여기엔 맹독을 머금은 살모사로 변해 버린 '정치'가 자리한다. 국민을 바라보는 정치가 아닌 '싸디 싼' 표만 쫓는 반푼어치 정치인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를 교묘히 악용하는 사악한 '사꾸라 정치인'이 부지기수다. 싼티 풍기는 유권자의 표심도 이에 못지 않다. 이는 나의 표심이다.
어쨌든 상황이 '이 모양 요 꼴'이니 사회는 험악해지고, 나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적이 되는 세상이 돼 버렸다. 이는 부정 못할 엄연한 지금의 대한만국의 현실이다.
유권자 잘못인지, 정치인 잘못인지는 별 의미 없다. 5천만이 서로 적이 된 것 같은 지금의 한국에선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가치 없는, 고리타분한 이분법일 뿐이다
이래서 '깨어 있는' 여론은 작아서, 힘이 없어서 애가 탄다.
백성은 나랏일 돌아가는 것에 무지(무식 아님)하지만 성(화)이 나면 무섭다. 잔잔한 파도가 일순간 큼지막한 배를 덮쳐 삼킨다. 배는 임금이다.
이 작은 여론이 물밑 무관심을 꺼내 깨부수어야 한다.
잔소리도 관심이 있어야 하게 된다. 대상을 포기하면 관심 자체를 두지 않는다. 아예 말을 하지 않는다. 부부지간에도 무관심이 제일 큰 적이라고 한다. 말로 다투는 부부는 이혼을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 같은 말도 있다.
저잣거리 식당 등에서 소소한 정치 이야기가 많아지는 시대가 다시 와야 한다. 정치란 서로간에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여야의 정치란 토론과 언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정책을 정돈해 국민 앞에 내놓는다. '정치'를 잘 하란 말은 이런 뜻을 둔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강한 맛에 희열을 더 느끼고 있다. 재료를 잘 버무려서 내는 감칠맛이 제일일진대 이 맛은 온데간데 없고 자극적인 맛이 대세로 자리하고 있다.
라면도 매운 게 인기를 더하는 세태다. 위가 쓰려도 자극이 주는 내상을 감내한다는 것이다. 내상은 암이 되기 싶다.
한국 사회가 이런 내상에 곪아가고 있다. 시기를 놓치면 정말 큰일이 된다.
미국이 여러 문제점을 갖고 있지만 지금도 강한 게 여야가 싸우다가도 국익이나 국가란 테두리 안에는 머리를 맞댄다. 카터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오바마와 트럼프가 적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는 나라다.
어폐가 있을 수 있지만 기자는 이를 '양반 스타일'로 봤다. 이에 반해 한국의 정치는 '머슴형'이다.
10대 경제 대국의 자리를 차지한 우리 옆에, 내 주위에 머슴살이 스타일에 너무 많다. 너내 없이 이런 비상식적이고 수준 낮은 것들에 너무 찌들어 있는 건 아닌가?
태평성대란 옛 왕조시대의 역사서에서만 볼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좋은 기회다.
서두에 언급됐던 고집불통의 윤석열의 무리와 폭주기관차 같은 무자비한 이재명의 무리만 쫓아내고, 몰아내면 된다.
이 시대의 우리도 '역사적 태평성대'가 아닌 '21세기 태평성대'를 만들 수 있다. 만들고 누려보자. 못 누릴 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