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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기획] '3대 재벌 탄생지, 지수 승산을 가다'-구 씨 가문(3-5)

정기홍 기자 승인 2022.06.13 08:05 | 최종 수정 2024.08.12 09:36 의견 0

※ 더경남뉴스의 창간 기획 '지수 승산을 가다'의 7번째 글에서 '만석꾼 허만정과 그 후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8번째에서는 '구인회와 그 후손들'을 짚어봅니다.

승산마을의 허 씨와 구 씨 두 가문의 이야기는 7개 분야로 나눠 ▲허 씨의 생가와 본가(3-1) ▲구 씨의 생가와 본가(3-2) ▲허 씨의 가문(3-3) ▲'만석꾼' 허만정과 그 후손들(3-4) ▲구 씨의 가문(3-5) ▲구인회와 그 후손들(3-6) ▲두 가문의 공동창업(3-7) 순서로 싣습니다.

승산마을의 이병욱 전 이장(79)이 취재에 도움을 주셨습니다.

■ 연재 순서

1. 들어가는 글

2. 승산마을의 산세와 지세

3. 승산마을의 유래와 변천사

4. '승산 터줏대감' GS의 허 씨-'허 씨의 사돈' LG의 구 씨 가문

- 허 씨 가문의 생가와 본가

- '허 씨 사돈' 구 씨 가문의 생가와 본가

- 허 씨 가문 이야기

- '만석꾼' 허만정과 그 후손들

- 구 씨의 가문

- 구인회와 그 후손들

- 두 가문의 공동창업(예정 글)

구 씨 가문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에는 LG그룹(구 씨 가문)과 GS그룹(허 씨 가문) 창업주들과 후손들의 생가와 본가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구 씨 가문이 이 마을에 살게 된 것은 현풍현감을 지낸 연암(蓮庵) 구인회(具仁會·1907~1969년) LG그룹 창업주의 7대조인 구반(具槃)이 허 씨네로 장가를 들면서부터다. 이후 허 씨와 구 씨 가문은 대대로 사돈을 맺었다.

승산마을의 양가를 이룬 두 가문은 구 씨 가문이 구한말 홍문관 대재학을 지낸 만회(晩悔) 구연호(具然鎬·1861~1940년) 선생의 선비정신을 기반으로 한다면, 허 씨 가문은 만석꾼 허준(許駿·1844~1932년) 선생의 근검절약과 성실함으로 가세를 일으켰다.

앞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승산마을은 600년 전 김해 허 씨가 세거(世居·한 고장에 대대로 삶)한 이후 300년 전에는 능성 구 씨가 마을로 들어와 살아온 곳이다.

능성 구 씨 가문은 본래 경기 양주군과 파주군 등지에서 살아온 '뼈대가 있는' 문인 집안이었다. 따라서 가문에서 수많은 장원 급제자가 배출됐다고 전해진다.

구인회 창업주를 기준으로 12대조인 구사민(具思閔)은 좌찬성(左贊成·의정부 종1품) 구사맹(具思孟)의 동생이며, 9대조 구음(具崟)도 승정원 좌승지(정3품 당상관)를 역임했다. 8대조 구문유(具文游)가 경북 고령현감, 7대조인 구반(具槃)이 현풍현감을 지낸 이후 벼슬을 하지 않고 승산마을에서 살았다.

이어 구인회 창업주의 할아버지(조부)인 구연호 선생이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을 다시 시작했다.

▶구인회 할아버지 구연호

구연호(1861~1940년) 선생은 대한제국 시기에 홍문관 교리와 사간원의 정언(正言·정6품)을 지냈다.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삼사(三司)라고 왕권을 견제하는 3개 관아가 있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이른다.

홍문관(弘文館)은 왕의 자문 역할과 문서 작성, 학술 연구 등을 맡았고 사간원(司諫院)은 임금의 하루 일과를 기록해 언론 역할을 했다. 사헌부(司憲府)는 감찰을 담당했는데 감사원 성격이다.

그는 고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 조정에서 하던 간언(諫言·잘못을 고치도록 하는 말)이 일제에 의해 힘을 잃자 관직을 버리고 승산마을로 낙향한 뒤 손자인 구인회를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언제나 구 씨 가문의 대종중 재실인 '창강정(滄江亭·숙입문)'에 은거 하며 세상 사람과 담을 쌓던 그가 평생 외부로 나온 것은 딱 두번이라고 전한다. 일가의 문상같은 긴히 외출할 때는 커다란 왕 갓을 쓰고 나섰다고 한다.

구 씨 가문 대종중의 재실인 창강정 입구. 정기홍 기자

순종이 경부선 철도 개통식(1908년) 참석차 부산(현 부산역)에 순행(巡幸)을 할 때 순종을 알현하기 위해 부산으로 외출했고, 또 한번은 손자 구인회가 1931년 동생 구철회(具哲會)와 함께 경남의 중심상권이던 진주 중앙시장에서 포목상을 열었을 때였다.

참고로 순행(巡幸)이란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쓰는 '감독하거나 단속하기 위해 시찰하거나 순회하며 돌아다닌다'는 순행(巡行)과 다르다. 임금의 행차에는 '행복할 행(幸)'을 특별히 쓴다.

구인회 LG그룹 창업주는 이러한 강한 유교 가풍이 사업을 시작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줬지만 외려 이 가풍 덕에 조부(구연호)의 지지를 받고서 적극적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구인회 창업주는 평상시 근검절약이 몸에 밴 검소함과 소탈함을 지녔고, 사람을 존중하는 가풍으로 이웃과 나누며 지내 LG그룹을 오늘날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기업의 사회적 책임) 기업으로 만드는 토대를 만들었다.

▶ 구인회 아버지 구재서

구인회 LG 창업주의 아버지 춘강(春崗) 구재서(具再書·1886~1956년) 선생에 관한 알려진 이야기는 많지 않다.

승산마을에는 구재서 선생을 추모하는 '모춘당(慕春堂)'이란 사당이 있다. 구인회 창업주의 아들인 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6·25때 불타 없어진 생가 터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모춘당은 이후 조상 추모와 함께 후손의 교육과 가풍을 익히는 곳으로 이용된다. 구 씨 가문에서는 새 며느리나 사위를 맞으면 1년에 한 번은 이곳으로 데려와 가훈을 새기고 가풍을 익히도록 한다. 행사는 주로 종가의 여성들이 주도한다.

모춘당에는 구인회 할아버지(구연호)가 내린 가훈이 기둥마다 적혀 있다. 구 씨 가문의 후대에 충효와 우애, 선비정신을 강조한 10계 덕목(身計·신계)이다.

내용은 ▲어버이 섬김에는 효성을 다하고,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을 다해라 ▲선대 훈계에 평소 삼감에 이어 바르게 할뿐 변하지 말라 ▲선비가 세상을 살아감은 도를 좋아하고 분수를 지키는 것 등 삼각오륜 성격은 물론, ▲형제 간과 종족 사이에는 서로 좋아할뿐 따지지 마라 ▲작은 분을 참지 못하면 반드시 어긋나게 된다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공경함으로 몸을 닦아라 ▲주색잡기를 하지 마라 ▲함부로 남의 보증을 서지 마라 ▲민사재판 때 소송하지 마라 등 처세를 강조한 문구도 있다.

이 덕목은 지금도 LG그룹의 기업가 정신인 '인화 경영' 속에 오롯이 남아 흐르고 있다.

▶ LG 창업주 구인회

구인회(1907~1969년) LG 창업주는 아버지 구재서 선생과 어머니 진양 하(河) 씨 사이의 장남으로 경남 함안군 하봉면(현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에 바로 담 바로 옆집에 살던 허을수(許乙壽) 여사와 결혼해 아들 구자경을 두었고, 1942년 5월에는 장남 구자경을 장가 보내고 3년 후에는 장손자 구본무를 얻은 후 구본능·구본준·구본식 등의 손자를 줄줄이 뒀다.

구인회 LG 창업주의 젊은 시절 가족 사진

LG연암문화재단으로 잘 알려진 연암(蓮庵)이란 아호는 LG그룹의 성장 기초를 닦은 부산진구 연지동(蓮池洞)에서 유래했다. 연지동에 있던 암자 아래 연못에서 따왔다.

그는 할아버지인 구연호 선생의 한학 가르침을 받았다. 결혼 다음 해인 1921년 마을 앞에 개교한 지수공립초등보통학교(지수초교·현 K기업가정신센터) 1회 졸업생으로 이름이 올라있다.

다만 그가 한학만을 배웠는지, 이후 학교를 다녔는지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있다.

학교를 다녔다는 주장은 구인회 창업주가 1921년 일신여고(현 진주여고) 설립에 참여하고 훗날 중외일보 경영자가 된 손위 처남인 허선구의 권유로 지수보통학교에 편입했다고 한다.

지수보통학교 시절 일본인 교장의 조선 학생 차별에 항의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며 동네 젊은이들을 일깨우는 장근회(槳勤會) 활동에 앞장섰다는 주장이 이를 뒷받침 한다.

이 학교는 구인회 창업주와 5형제(철회·정회·태회·평회·두회), 장남인 구자경 명예회장과 그의 형제들까지 다녔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도 승산마을로 시집 온 둘째 누나집에서 6개월 간 수학한 명문이다.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LG 홈페이지 캡처

구인회 창업주는 이후 1926년 서울 종로구에 있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2년을 수료한 뒤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당시 고향 승산마을에는 일본인 무라카미가 잡화점을 독점 운영하면서 비싼 가격으로 마을 주민한테 판매해 큰 돈을 벌고 있었다. 구인회 창업주는 싼 값에 마을 주민들에게 생필품 공급하기 위해 지수협동조합을 설립해 이사로 있다가 1929년에 이사장이 됐다.

여기서 장사 경험을 한 뒤 1932년 진주 중앙시장에서 포목점(옷감 상점)인 구인회상점을 열었다. 중앙고보 때 신학문과 신문물을 접한 것도 영향을 줬다.

조부(구연호)와 부친(구재서)을 설득해 사업 밑천으로 2000원을 얻어냈고, 큰집으로 양자로 들어간 동생 구철회를 설득해 1800원을 내게 했다. 도합 3800원으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사업 첫해 여름 장마로 인해 남강 둑이 터져 포목이 물에 잠기면서 당시 쌀 100가마에 해당하는 500원이란 큰 손해를 봤다.

이어 문중의 땅을 저당 잡히고서 8000원을 융자 받는 등으로 돈을 모아 많은 양의 포목을 들여놓았다. 다행히 그해 가을에 대풍이 들어 여유가 생긴 집안들은 자식들을 결혼시키기에 바빴다. 당연히 옷감을 날개 돋힌듯 팔렸고 큰 돈을 벌었다. 맞춤 옷감까지 제공하는 아이디어로도 가게는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말고도 재기할 당시 ‘원창약방’을 운영하던 진주 거상인 원준옥 사장이 구인회의 됨됨이를 보고 큰 조건 없이 거금을 빌려줬다고 한다. 두 사람은 1935년 10월 5일 설립된 마루니 진주화주운송회사 등기이사를 했었다.

구인회에게 돈을 지원한 원준옥 사장의 진주 원창약방 전경. 원한의원 제공

원 사장은 당시 원창약방 말고도 진주양조합자회사(1931년 설립), 진주어채(魚菜)주식회사(1935년 설립), 마루니 진주화주운송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원 사장의 원창약방에 이어 아들 원종록(대원한약방), 손자 원호영(현재 원한의원 운영)까지 3대째 한방 역사를 가진 명문가다. 원 사장은 한국의 약령시 역사, 진주의 경제·기업사 연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때마침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한 처남 허윤구와 함께 경영한 '조만물산'도 날로 몸집을 키워 1940년 구인회상점은 (주)구인상회로 발전했다. 조만물산은 주로 마늘, 명태 등을 수출하고 콩을 수입하는 무역업을 했다.

이처럼 사업이 번창하면서 구인회 창업주는 일제강점기 말 당시 만석꾼 소리를 들을 정도로 부를 키웠다. 30대 초반 때였다. 구인회 창업주는 물건이 잘 팔린다고 중간에 가격을 올리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 진주 중앙시장 포목상 자리(현 대안3동 일대)는 현재 별다른 표지가 남아 있지 않고, 진주의 명동거리인 패션가로 변모해 있는 상태다.

거금을 쥔 구인회 창업주는 1942년 여름, 변장을 하고 찾아온 거물급 독립운동가인 백산(白山) 안희제 선생을 맞아 거액(1만원)의 독립운동자금을 주며 임시정부에 전달토록 했다. 그의 부친 구재서 선생이 1930년 독립운동가 구여순을 통해 5000원을 김구 선생에게 전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

구인회 창업주는 해방이 된 1945년 진주 포목상을 정리하고 일본과의 무역 거래가 많은 부산으로 옮겼다.

이 때부터 LG그룹을 이룬 구 씨 가문과 허 씨 가문의 동업이 시작된다.

승산마을 '만석꾼' 허만정 선생은 자신의 재산 3분의 1과 셋째아들 허준구를 구인회 LG 창업주에게 경영 수업을 가르쳐 달라며 맡긴다.

이후 1947년 LG그룹의 토대가 된 락희화학공업사가 설립된다. 나중에 LG건설 명예회장이 된 허준구는 구철회 LIG 회장의 장녀인 구위숙 씨와 결혼했다.

다음 회인 '두 가문의 동업'에서 구체적으로 다룬다.

LG를 창업한 연암 구인회 창업자의 생가 대문. 그는 1931년 진주에서 포목상을 하다가 6촌 사돈인 만석꾼 허만정 선생의 자금 지원과 그의 3남인 허준구를 데리고 1947년 부산에서 락희화학을 설립 LG와 GS의 기틀을 마련했다.

구인회 창업주는 조부(구연호)의 영향으로 검소함이 몸에 배어 담배도 고급과 저급 두 종류를 갖고 다니며 손님에게는 고급 담배를 권하고, 자신이 필 때는 싼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이재(理財)에 밝은 아이로 승산마을에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일대기를 기록한 '연암전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화창한 봄날, 마을 한복판 빈터에서 동네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는데 한 구석에서 두 소년이 1전(1원의 100분의 1)짜리 동전 한닢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먼저 잡은 사람이 임자지. 이거 놔라!”/ “무슨 소리고. 너나 나나 똑같은 임자 아이가”

“1전을 어떻게 나눠 갖는단 말이고”/ “어쨌든 나누어 가져야지, 그냥은 몬 준다”

옆에 지켜 보던 구인회는 동전을 쥐고 있는 아이를 달래 마을 어귀 개천가에 있는 잡화점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동전 한닢으로 성냥 두갑을 사서 한갑씩 나눠 가지로록 했다. '작은 전쟁'은 평화적으로 끝이 났다

어린 그의 합리적인 이재 기질 영향에 훗날 사돈인 허 씨 가문은 그에게 거액을 맡겨 동업자로 대성 하고, 자손대에 와서도 굴지의 그룹 분리작업(LG그룹-GS그룹 분리)에서 잡음 하나 없이 나눠가졌다.

그는 일화는 또 있다. 군수가 가마를 타고 행차한 후에는 마을 아이들을 불러 모아 지게를 들게 하고 자신이 그 위에 올라 군수 행차를 흉내 내곤 했다. 또 타지에서 온 서당 접장이 까다롭게 굴어 성이 차지 않으면 아이들과 짜고 포구총을 만들어 골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어른을 모시는 효심이나 우애도 아주 좋았다고 한다.

언젠가 작은누나가 화롯불을 엎질러 장판이 누렇게 탔다. 꾸중을 들을까봐 걱정이 태산 같던 누이에게 그는 “걱정하지 마라. 할아버지 오시면 내가 했다고 말할게”라고 해 큰 나무람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당시는 손녀보다 손자를 더 귀여워 하는 시대였다.

구인회 창업주는 부산 시절인 1959년 지금의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를 설립하는 등 사세를 키우다가 덩치가 커지면서 1969년 본사를 부산에서 서울로 옮겼고, 1960년대를 마감하는 그해 12월 31일에 맞춘 듯 별세했다.

당시 그가 일군 럭키그룹은 락희화학, 금성사, 반도상사, 호남정유, 금성판매, 한국콘티넨탈카본, 호남정유, 금성통신, 금성전선, 국제신보, 경남일보 등으로 대기업군으로 성장한 상태였다.

호남정유공장 기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과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캡처

경기 용인군 기흥면 하갈리 유택에 안장 됐다가 1983년 1월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 선영으로 이장했다. LG 연암기념관은 부산시 부산진구 연지동에 있다.

그는 살아생전 번 돈으로 독립자금도 댔다.

일제강점기 말 삼엄했던 감시망 속에서 기업의 파멸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 쓰촨(四川)성에 있는 충칭(重慶) 임시정부에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보냈었다.

▶구인회 형제들

구인회 LG 창업주의 형제들은 진주와 부산에서 형을 도와 기업을 일으키는데 함께했다. 본사를 서울로 옮긴 뒤 굴지의 글로벌 그룹으로 자리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각자 분가를 하게 된다.

분가한 범LG가 그룹 CI들

여섯째 형제 중 첫째동생 구철회는 형 구인회와 함께 진주에서 포목점을 했다. 1999년 11월 LG에서 분리해 LIG를 만들고 회장을 역임했다. 하지만 회사를 키우지 못했다.

LIG그룹은 원래 LG화재보험 중심의 보험업 위주여서 LG화재그룹으로 불렸다.

그룹명인 LIG는 모체인 LG의 약어 사이에 I를 넣은 것으로 'Leading Insurance(보험) Group'이다. 실상은 'LG Insurance Group'으로 하려고 했으나 LG를 사용할 수 없어 Leading을 쓴 것이다.

하지만 LG화재보험은 KB금융그룹(KB손해보험)에 팔려 현재 그룹에 보험업이 없다. 따라서 방위산업 위주인 지금은 'Leading Innovation Group'이라는 슬로건을 쓰고 있다.

LIG그룹은 2015년 이후 방산특화 기업집단이 돼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2016년 초 두산DST 인수전에 참여했으나 한화테크윈에 패했다.

지금은 구철회 회장의 장남 구자원 회장, 둘째 구자성 전 LG건설 사장, 셋째 구자훈 전 LIG손보 회장, 넷째 구자준 전 LIG손보 회장의 형제 공동경영체제는 지났다.

3대로 내려오자 구자원 회장의 두 아들인 구본상 전 부회장, 구본엽 전 부사장이 그룹의 중심을 맡고 있다.

구자원 계는 LIG 그룹 명칭과 함께 계열사 중 제일 큰 LIG넥스원, LIG시스템, 휴세코 등을 갖고, 둘째인 구자성 전 사장의 아들 구본욱은 LIG투자자문을 떼 내어 LK투자자문(현 LK자산운용)으로 이름을 바꾸고 독립했다. 넷째인 구자준 계는 LIG인베니아를 가졌는데 20016년 LIG를 떼 인베니아로 사명을 바꾸며 계열분리했다.

둘째 동생 구정회 전 LG전자 사장은 경성전기학교(현 수도전기공고)를 마치고 구인회상점에 합류해 일을 도왔다.

그는 1945년 형 구인회 창업주가 부산에서 운영하던 무역회사인 ‘조선흥업사’에 기술자 김준환 씨를 영입해 LG가 화장품 사업에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화장품 이름을 ‘럭키’로 붙여 LG그룹의 기반을 닦는 한 축을 담당했다.

구정회 전 사장은 부인 김증문 씨와의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다.

구인회 창업주의 셋째 동생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은 제1공화국에서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6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의원 시절 지리산 자락 물을 막은 남강댐을 만들어 홍수에서 해방시켜 진주 포목점 수마를 연산케 한다. 진주고등학교 총동창회장도 역임했다.

그는 정치를 하기 전엔 LG그룹 전신인 금성사와 럭키금성그룹에서 경영인으로 활동했다.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은 2004년 다섯째(구인회 넷째동생)인 구평회(E1 명예회장), 막내 구두회(예스코 명예회장)와 함께 LG전선그룹(2005년 LS전선그룹 변경)을 만들어 독립했다.

그룹을 분리할 때 LG전선, LG산전, LG니꼬동제련, LG칼텍스가스, 극동도시가스 등을 갖고 나왔다.

따라서 지금의 LS그룹은 전선, 전력설비, 금속, 에너지 등 기간산업에 기반을 둔 대표적인 B2B(기업 대 기업) 그룹이다. B2B 사업 특성상 대중에게는 덜 알려져 있지만 LG계열에서 분리된 그룹 중에서 GS그룹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재계 서열 15위(2021년 기준)다.

LS전선그룹 초대 회장은 구태회 명예회장의 장남인 구자홍을 내세웠다. 이후 창업 2세인 구태회-구평회-구두회 3인의 장남들은 선대가 정한 '사촌형제 공동경영'의 원칙에 따라 차례로 승계했다.

즉 구자홍 회장이 10년간 재임 후 2013년 사촌 동생 구자열 회장에게 승계하고, 구자열 회장은 2022년 사촌동생 구자은 회장에게 승계한 후 자신은 ㈜LS의 이사회 의장으로 남았다.

그러나 구자홍 초대회장(별세 직전 LS니꼬동제련 회장)이 2022년 2월 76세의 일기로 별세하고 그의 자녀들이 그룹 내 지분을 정리하면서 창업 3세부터는 이 원칙이 바뀔 것으로 보인다. 장남인 구본웅 씨는 LS그룹 경영에서 빠져 벤처투자회사인 포메이션8그룹 대표로 있다.

구자홍 LS그룹 초대 회장. LS 제공

지수마을에서 태어난 구자홍 초대회장은 경기고를 졸업, 고려대에 재학 중 미 프리스턴대로 유학했고 LS그룹이 분리 전에는 LG전자 대표를 역임했다. 지난 2004~2012년 9년간 LS그룹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LS그룹 회장 때는 본업인 전기·전자, 소재, 에너지 분야 인수합병(M&A)과 사업 다각화, 글로벌 성장 전략을 펼쳐 계열 분리 당시보다 매출은 4배, 영업이익 3배, 기업가치는 7배로 키웠다. 스마트그리드와 신재생에너지, 전기차 핵심부품, 해외자원 개발 등 친환경 사업을 차세대 핵심 사업으로 육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구자경 명예회장

상남(上南) 구자경(具滋暻·1925~2019년) LG그룹 명예회장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진주군(현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구인회 LG 창업주의 6남 4녀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부친 구인회 창업주는 서울 유학 중이었다. 아호 상남은 구자경 명예회장이 태어난 승산마을 생가 앞 작은 다리 상남교에서 따왔다. 종교는 불교다.

충남 천안 연암축산원예대(현 연암대)에서 버섯을 재배하고 있는 고 구자경 명예회장. LG그릅 제공

지수초등학교(14회)를 졸업하고 진주중고- 진주사범학교를 나와 5년간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교사생활을 하던 25세 때 아버지 구인회 창업주의 부름을 받고 LG그룹 초기 부산 시절인 1950년 락희화학공업사(LG그룹 모태인 현 LG화학) 이사로 합류하면서 사업과 첫 연을 맺었다.

부친의 부름이 있기까지는 진주사범을 졸업하고 고향 지수초등학교에서 교사의 길을 걷고 있었다. 별명이 호랑이 선생으로 불릴 만큼 원칙주의자로 알려졌다.

그는 이후 락희화학과 금성사를 오가며 18년 간을 부산 공장에서 보냈다. 초기 3년은 대부분 공장에서 먹고 자 먼지와 기름을 뒤집어쓴 모습에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오해받기도 했다고 한다. 1960년대 후반까지 부산에 머물며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다.

LG그룹의 경영 1.5세인 셈이다.

1962년 락희화학 시절 부산 연지동 공장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구인회 LG 창업주, 고 구평회 E1 명예회장, 구자경 LG 명예회장. 4남 구자두 LB그룹 LB인베스트먼트 회장. LG그룹 제공

그룹을 총괄권을 이어받아 럭키금성그룹 회장(1970~1995년)을 역임하면서 그룹 회장 취임 당시 260억원이던 매출을 무려 30조원 규모로 키워냈다.

1974년에 럭키그룹으로 그룹체제로 전환시켰고, 1983년부터 럭키금성그룹으로 바꿨다가 1995년 1월 지금의 LG그룹으로 명칭을 정해 사용하고 있다. LG그룹으로 사명을 바꾸면서 맏이인 구본무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겼다.

럭키금성그룹 회장이 된 일화도 있다.

구인회 창업주의 장례(1969년 12월 31일 사망)를 치른 지 4일 후인 1970년 1월 7일 럭키그룹의 시무식에서 구철회 락희화학 사장(당시 61세)은 “자경이 자네가 오늘부터 저 자리에 앉게”라며 단상 중앙의 회장석을 가리켰다. 럭키금성의 2대 총수를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구자경 회장의 취임은 재벌 2세의 첫 전면 등장으로 그룹 내는 물론 재계에 세대교체 등 큰 바람을 일으키는 신호탄이었다.

무엇보다 LG그룹의 오늘날 경영 철학으로 상징되는 인화와 자율경영, 컨센서스(consensus·구성원들의 의견 합의) 문화는 그가 회장에 취임하며 싹틔운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

‘한국 자본주의의 개척자들’이란 책(2003년 간)은 ‘LG에는 연말을 앞두고 그룹회장과 각사의 사장이 새해를 설계하기 위해 독대하는 컨센서스 미팅이라는 제도가 운영되는데, 이러한 문화에서는 회장이라고 군림할 수가 없다. 회장이 권위주의적이 되면 컨센서스 문화는 쇠락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본사를 서울로 옮긴 이후 그는 1972년 초대 통일주체국민회(대통령 선거인단)의 대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고려대를 졸업해 1979년부터는 고려중앙학원 이사도 맡았다. 1982년부터는 고려중앙학원 관계사였던 동아일보사 이사도 맡기도 했다.

그는 1987년부터 2년간 노조 분규로 극심한 진통을 겪은 시기에 전경련 회장을 맡았다.

그는 1970년 2월 LG그룹의 모체 기업인 락희화학을 민간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증권거래소에 상장시킨 기록도 갖고 있다.

회장 재임 25년 동안 그는 그룹의 안정과 성장에 주력했다. 그는 1995년 2월 근속 45년, 회장 재임 25년을 끝으로 그룹의 원로들과 동반 퇴진했다. 평소 "예순아홉까지 경영혁신을 궤도에 올리고 물러나겠다"고 말하곤 했다.

말년엔 LG그룹 명예 회장직을 갖고 있으면서 충남 천안 연암대 농장에서 아내와 함께 난(蘭)·버섯 재배 등 자연과 벗하며 지내다가 2019년 12월 14일 숙환으로 별세한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생전에 고향 진주와 지수초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는 "어릴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남강의 지천인 염창강 강줄기를 따라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고 배가 고프면 강가 수박밭에 들어가 훔쳐먹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 구인회 창업주의 유지를 받들어 20여년 전 지수면에 상남복지회관을 건립했다. 이곳은 경로당, 어린이집, 아동센터, 목욕탕 등의 시설울 갖추고 주민 휴식처가 되고 있다.

또 지난 2002년 지수초교에 체육관 겸 급식시설인 '상남관'을 지었고, 회갑 기념으로 1968년 진주성 안에 진주시립연암도서관을 지어 진주시에 기증했다. 연암도서관은 1985년 자신의 돈으로 지금의 선학산으로 옮겨 신축했다. LG연암문화재단은 1970년부터 매년 도서관 운영을 지원하고 있다.

84년에는 진주시 가좌동에 연암공대를 설립해 인재를 육성하고 있다.

▶ 3대 구본무 명예회장···LG-GS 분가 잡음 없이 마무리

구인회 LG 창업주의 손자인 구본무 3대 LG그룹 명예회장은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 중 육군 사병으로 입대해 만기제대 후 부친(구자경)의 요구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클리블랜드대학원 등에서 6년간 경영이론을 익혔다.

귀국 후 럭키에 입사해 수출과 관련한 금융 판매 실무를 익히면서 바이어 접대 등 궂은 일을 경험했다. 성격이 워낙 소탈해 동료나 아랫사람과 소줏잔을 기울이는 일이 흔했고, 술자리에서는 분위기에 맞는 농담을 즐겼다고 전한다.

구본무 회장으로 있던 2005년 LG그룹은 선대부터 동업을 해오던 허 씨 가문의 GS그룹과 계열 분리를 단행했다.

앞서 LG그룹은 2004년 5월 28일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LG칼텍스정유, LG유통, LG홈쇼핑 등 서비스업 부문의 출자를 담당할 신설법인 GS홀딩스 설립건을 승인했다.

LG그룹(구 씨 가문)과 GS그룹(허 씨 가문)이 65대 35로 나누었다. LG그룹은 전자·통신·화학을 갖고, GS그룹은 정유·유통·건설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양측이 분리작업 과정에서 한치의 마찰 없이 마쳐 당시는 물론 지금도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양 측은 더도 덜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구본무 회장은 한 신문매체와의 인터뷰에서 “GS그룹과는 처음에 합의한 대로 계열사를 나눴어요. 원칙에 따라 하니까 이의도 없었고 다 행복해 합디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LG그룹에 남은 전자와 디스플레이, 화학, 통신 중심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GS그룹과의 계열 분리에 2003년엔 LS그룹 계열분리를 했다. GS와의 분리에 앞서 작은 것부터 처리한 사전 정지작업 성격이었다.

LS그룹은 구인회 창업주의 6형제 중 넷째인 구태회(LS전선 명예회장), 다섯째 구평회(E1 명예회장), 막내인 구두회(예스코 명혜회장) 형제가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이보다 한참 앞선 1999년엔 구인회 창업주의 첫째 동생인 구철회 명예회장의 자녀들은 LG화재(현 KB손해보험)를 갖고서 LG그룹에서 독립해 LIG그룹을 만들었다.

이후 구철회 명예회장의 장남인 구자원 회장은 2004년 LG이노텍으로부터 방산 부문을 인수해 LIG넥스원을 설립하며 그룹 몸집 키우기에 나섰다. 하지만 LIG그룹은 그룹내 설립했던 LIG건설이 금융위기 후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2014년엔 주력인 LIG손해보험을 KB국민지주에 넘어가고 만다.

LIG손해보험이 매각되면서 LIG그룹 경영에 참여해왔던 구철회 명예회장 아들들은 분리 과정을 밟았다. 차남 구자성 LG건설 사장의 외아들 구본욱 씨는 2014년 말 LIG투자자문을 갖고 독립한 뒤 2015년 12월 LK자산운용으로 이름을 바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또 4남 구자준 씨는 현재 디스플레이 장비업체인 인베니아를 경영하며 LIG그룹과 분리했다.

이와 함께 2대인 구자경 명혜회장의 첫째 동생인 구자승 회장은 2006년 LG상사에 패션부문을 떼어내 LF를 설립했고, 장남 구본걸 씨가 회장으로 있다.

구자경 명예회장의 둘째 동생(구인회 3남)인 구자학 회장은 2000년 외식업체인 아워홈을 갖고 독립했다. 구자학 회장이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차녀 이숙희와 결혼하면서 구인회 LG 창업주와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사돈 관계가 된다.그는 지난 5월 타계했다.

구자학 회장. 지난 5월 타계했다.

​구자경 명예회장의 차남인 구본능 회장은 1996년 희성그룹으로 분리했다.

구본무 회장(구자경의 맏이)은 격식 차리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하지만 돈을 아끼지 않은 곳이 있었다. 그가 지난 2015년 만든 사회에 기여한 이들을 기리는 ‘LG의인상’이다.

군 복무 수행 중에서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했거나 교통사고 현장서 사람을 살리고 화재 속에서 사람을 구하거나, 평생 김밥장사로 모은 재산을 기부한 아주머니 등에게 주는 상이다.

다른 기업과 달리 시상식도, 수상 기념사진도 따로 없다. 의인에게 직접 찾아가 조용히 표창과 부상을 전달한다. 격식에 구애 없이 산 구본무 회장의 평소 지론에 따른 것으로 보면 된다.

구본무 회장

구본무 회장은 지난 2018년 5월 2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글로벌 경영에 무척 신경 쓴 그가 20년이 넘게 연구개발에 힘써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시킨 2차전지가 요즘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생전에 서울 강서구 마곡첨단지구에 계열사 연구시설을 모아 놓은 LG테크노파크EH 큰 업적이다.

항공 촬영한 서울 강서구 마곡 'M-밸리'의 모습. 가운데 있는 건물들이 LG테크노파크 연구단지 건물들이다. 서울시 제공

▶구인회 창업후 4대가 경영

현재 LG그룹은 창업 4대째인 구광모(44) LG그룹 회장 총괄하고 있다. 많은 선대가 진주 지수의 승산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구인회 창업주 이후 4대째로 내려오면서 LG의 인맥은 거의 '서울 사람'으로 채워져 있다.

구 회장은 경복초교, 봉은중, 영동고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주에 있는 명문 로체스터 공과대학(컴퓨터과학 학사)를 나왔다.

친부모는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과 강영혜 여사다.

구본무 LG그룹 명예회장이 타계하자 2018년 6월 LG전자 대표로 선임됐고 자동으로 회장직을 이었다. 구본무 명예회장에게 아들이 있었으나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늦둥이 딸도 있지만 LG그룹이 세워 놓은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당시 40세인 구 회장을 앉혔다 장자 상속 원칙을 철저히 지켜가고 있다.

구 회장은 취임 이후 젊음을 앞세워 보수적인 LG그룹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공격적인 경영에 나서 체질 개선에 나서고 있다.

인공지능(AI), 로봇, 전장, 전기차 배터리 등 신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만성 적자로 골치를 앓던 비주력 사업은 과감히 버렸다. 국내외 경쟁 기업들과 연이은 특허 소송전을 벌이고 OLED TV와 LG 그램 광고 등 마케팅에서도 적극적으로 변했다. 전에 볼 수 없는 LG의 모습이다.

취임 직후인 2019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서 벌여왔던 SK와의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은 지난해 2월 최종심에서 이겼다.

대규모 적자를 낸 LG디스플레이의 LCD부문 구조조정(2018년)을 단행 했고, 그동안 적자를 기록했던 MC사업부(LG폰) 청산을 발표(2021년 1월)하는 결단을 내렸다. MC사업부 청산을 발표한 날 LG전자 주가는 12% 뛰었다. 삼성과 애플, 중국 휴대전화 제조업체에 끼여 만연 적자를 기록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하지 않아 '인화의 LG' 모토는 그대로 가져가고 있다.

휴대전화 사업과 관련한 에피소드도 있다. MC사업부 직원 연봉이 높은 편에 속했는데 그 이유로 연봉이 작으면 삼성전자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란 얘기다. 가장 큰 수익을 내는 가전부문 직원보다도 매년 적자 나던 MC사업부 직원 연봉이 많이 높았다.

※ 다음은 '두 가문의 공동창업'(3-7) 기사가 이어집니다. 이로써 9번에 걸친 지수면 승산마을의 허 씨와 구 씨 가문 글은 끝이 납니다.

이어 경남 의령으로 옮겨, 지수초교를 다녀 승산마을과 연관이 많은 '삼성 이병철 창업주' 탄생지를 조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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