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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속담 순례] '오려논에 물 터놓기'(34)

정기홍 기자 승인 2024.05.19 14:37 | 최종 수정 2024.05.20 14:37 의견 0

농어업을 중시하는 더경남뉴스가 농업과 어업과 관련한 속담(俗談)을 찾아 그 속담에 얽힌 다양한 의미를 알아봅니다. 속담은 민간에 전해지는 짧은 말로 그 속엔 풍자와 비판, 교훈 등을 지니고 있지요. 어떤 생활의 지혜가 담겼는지를 살펴봅니다. 편집자 주

윗논 물꼬를 통해 아랫논으로 물이 내려가는 모습. 예전 농삿물이 귀했던 시절 모내기철엔 물을 서로 대기 위한 물꼬 싸움이 대단했다. 일단 싸움이 나면 거친 목소리가 조용한 농촌 들녘을 들썩이게 했고, 이웃은 한동안 원수처럼 지냈다. 정창현 기자

'오려논에 물 터놓기' 속담은 '물이 한창 필요한 시기에 오려논의 물꼬를 터놓는다'는 뜻으로, 심술이 매우 사납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려논이란 '올벼를 심은 논'입니다. 오려논은 잘 사용하지 않는 옛 우리말인데 이 속담이 꽤 오래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례론 '어머니는 매년 오려논에서 나온 햅쌀로 할배·할매 제사상을 차리신다'가 있습니다.

수리 시설이 아주 빈약했던 시절, 봄철 모내기철엔 물이 귀했습니다. 봄가뭄이 심할 땐 다랑이(산골짜기 비탈진 계단식 좁고 긴 논배미) 논에는 모를 내지 못하고 한동안 논을 놀려놓았지요.

쌀농사가 제일이던 시절이었으니 농부(농업인)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갑니다. 실제 기자도 소싯적에 골짝 논에 모를 내지 못하고 그대로 둔 논을 더러 봤습니다.

지금은 작은 들에도 경지정리가 돼 있고, 수리 시설이 잘 갖춰져 격세지감을 절로 느낍니다. 논배미마다 수로가 잘 갖춰져 수도꼭지 틀 듯 수로 잠금쇠를 열면 아랫논이나 윗 논이나 곧바로 물이 들어갑니다. 불과 십수년 전에 많았던 양수기 등 양수 시설도 이젠 거의 보기 어렵습니다.

모를 내는 철에 물 가득 찬 논을 보노라면 상념들이 묻어납니다.

'물대기'와 '물싸움'이 먼저 연상됩니다. 이른바 물꼬 다툼입니다. 물꼬는 '논에 물이 넘어 들어오거나 나가는 좁은 통로'입니다.

물이 귀한 모내기철에 물길을 자기 논으로 대려고 이웃간에 다툼이 발생합니다. 워낙 원색적인 욕설이 오가며 다퉈 어감상 '다툼'보다 '싸움'이라고 해야겠지요.

물꼬싸움 소리는 대체로 아침 일찍 들려옵니다.

농민은 아침 일찍 들에 나와 밤새 자기 논에 대놓은 물이 제대로 들어왔는지를 확인합니다. 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입을 실룩거리며 밤새 물길을 돌려놓은 곳을 찾아 그 논의 주인과 다투는 것이지요. 시쳇말로 내일 다시는 안 볼 듯, 난리가 날 정도의 고성이 고갑니다.

논 물대기는 낮엔 이웃도 논에서 일을 하기에 한밤에 물길을 자기 논으로 놀려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꼭두새벽에 나가 물길을 자기 논에 댔다가 동이 트면 다시 물길을 본래대로 두는 경우도 있었지요. 이것도 눈썰미가 좋은 농민에겐 다 틀킵니다.

물싸움을 하는 어르신들을 보면 왜 저렇게 싸울까 하지만, 모내기 전후 나락(벼) 농사는 농가의 한해 성패를 갈랐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들에게 배려심이 없었던 것도 있고요.

윗논에 물이 들어오고 반나절 절도 지나서는 아랫논으로 내려주면 될텐데, 아니면 오늘은 이논 내일은 저논으로 '의논 좋게(의논 해서)' 하면 될텐테 말이지요.

하지만 수리 시설이 없었던 시절 싸음은 다반사였습니다. 오뉴월 뙤약볕 아래 벼논이 말가는 것을 보는 농심은 물 들어오는 것이 '하루가 여삼추'(하루가 삼년 같다)처럼 느껴지기도 했겠지요.

여기서 나온 속담이 '제논에 물대기'입니다. 이게 사자성어로 '아전인수(我田引水)'입니다. 나 아(我), 밭 전(田), 끌 인(引), 물 수(水)입니다. 뜻은 '자기에게만 이롭게 되도록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으로 이기적인 행동을 이릅니다.

참고로 '아전인수'에 '논 답(畓)'을 쓰지 않고 '밭 전(田)'자를 쓰는 것은 중국과 일본에선 논 답자가 없어 논과 밭을 '전(田)'으로 두루 사용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논을 수전(水田)으로 구분해 쓰기도 한답니다.

물꼬와 연관된 이야기도 이어봅니다.

논배미(논두렁으로 둘러싸여 구분해져 있는 논의 구역)에는 물을 담아 놓은 웅덩이(덤벙 혹은 둠벙)가 있었습니다. 지하의 물길이 높아 자연적으로 생긴 것도 있고, 농가에서 가뭄에 여긴하게 활용하려고 인위적으로 파서 만든 것도 있지요.

이 웅덩이는 1년 내내 마르지 않아 물방개, 미꾸라지, 우렁이, 붕어, 피래미 등이 삽니다. 겨울엔 스케이트를 타는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여름엔 물을 퍼내 미꼬라지 등을 잡기도 하지요.

물꼬 싸움과는 다르지만, 논가 웅덩이 물은 골짜기 다랑이 논에 모를 내거나 모를 심은 논에 물이 마를 때 물을 퍼서 논에 댑니다.

이를 두레질이라고 하는데, 웅덩이 가장자리에 긴 나무 등으로 삼각대를 세우고 여기에 줄을 매고서 물을 퍼 올립니다. 맞두레, 용두레, 무자위 등이 있습니다.

인천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용두래마을에 전시해 놓은 용두레 모습

용두레는 삼각 지렛대를 이용합니다. 진주 등 경상 지역에선 같은 삼각 지렛대를 이용ㅎ는데 양철 물통 등을 맨 앞에 매달고 웅덩이 물을 담은 뒤 퍼서 올렸습니다.

무자위는 물레방아처럼 나무바퀴를 활용합니다. 나무바퀴에 올라 서서 긴 작대기로 몸의 중심을 잡고서 발로 밝아가며 바퀴를 돌립니다.

전북 김제평야에서 무자위로 논에 물을 대는 모습. 한국학중앙연구원

맞두레는 용두레나 무자위로 물을 퍼올릴 수 없을 때 두 사람이 힘을 합쳐 합니다.

맞두레는 한 쪽이 "어리 하나, 어리 둘"하면 상대 쪽은 "올체"하며 장단을 맞춰 물을 논으로 퍼올립니다.

맞두레 용기. 맞두레질은 나무 용기에 묶은 새끼를 두 사람이 장단을 맞춰 양쪽에서 당기면서 물을 퍼올린다. 농촌진흥청 어린이홈페이지

오려논과 관련한 속담에 '거짓말도 잘하면 오려논 닷 마지기보다 낫다'가 있는데 '거짓말도 경우에 따라서 처세에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사람은 말을 잘해야 한다'는 생활 지혜를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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