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보기 힘든 광경이지만 오래 전, 큰 마을엔 방앗간(정미소)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벼나 보리를 빻았다. 도정을 하는 곳이다.
벼(나락)나 보리를 빻아 나온 껍질을 '왕겨'라고 하고 '등겨'라고도 한다. 경상도에선 이를 '왕기'와 '등기(딩기)'라고 말한다. 같은 뜻일까?
'겨'란 벼나 보리, 조 등의 곡식을 찧어 벗겨 낸 껍질을 통틀어 말한다. 방앗간에서 쌀과 보리를 찧을 때면 방앗간 바깥에는 겨가 가득 쌓인다.
왕겨는 곡식의 껍질을 처음 벗긴 것으로 거칠고 껄끄럽다. 소나 돼지도 안 먹는다.
왕겨는 별 쓸모가 없는 쓰레기와 같은 존재여서 썩혀 거름으로 사용 하거나 그대로 논밭에 뿌려 거름(퇴비)이 되게 했다.
다만 소마구나 돼지마구에 깔아줘 앉거나 누우면 푹신하게 만들고, 간지러운 몸을 비비게 했다. 이들이 누는 똥과 섞이어 좋은 거름이 됐다. 왕겨만 경운기로 실어 논과 밭에도 뿌려 거름으로 활용했다. 모깃불에도 넣어 모기를 쫒는 용도로도 이용됐다.
요즘은 삼겹살 초벌구이 때 왕겨를 태워 군내를 없애 풍미를 살린다고 한다.
왕겨는 친환경 제품 소재로도 활용된다.
생화학 가공 과정을 거쳐 친환경 일회용 용기인 그릇·포장재 등 생활용품과 육묘상자, 화분 등 농업용 자재로 이용된다. 환경 오염원인 플라스틱과 스티로폼을 대체할 수 있다.
왕겨를 싸게 매입해 저렴한 비용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고 제품 강도와 내열성도 뛰어나다. 소재가 왕겨여서 3~6개월 내에 완전히 분해돼 흙에 유기물을 공급하고 해도 전혀 없다.
왕겨 한지도 자연스러운 무늬에다 나쁜 냄새도 없애주고 원적외선을 발산해 건강에 좋은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왕겨 분말을 플라스틱에 첨가하면 환경호르몬을 낮추고 원가도 크게 절감할 수 있다. 왕겨 분말을 압축 성형해 합판이나 목재도 만든다.
베트남은 오래 전에 왕겨를 원료로 하는 화력발전소를 건설하기로 했엇다. 전력 생산비가 석탄이나 가스에 비해 30%가량 싸고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효과도 있다. 세계 5위권 쌀 생산국인 베트남에서 나오는 왕겨를 활용한 전략이다.
처음 벗긴 껍질(왕겨)에다 한번 더 속껍질을 벗긴 것을 등겨라고 한다.
왕겨는 소와 돼지가 먹지 않지만 등겨는 사료로 활용 한다. 등겨를 미강(米糠)이라고도 하는데, 쌀을 찧을 때 나오는 가장 고운 속겨다. 살겨란 말이 더 와닿는다.
등겨는 음식으로 활용됐다. 주로 쌀보리등겨를 썼다.
등겨 가루로 만든 장을 등겨장이라고 한다. 경상도에서 만들어 먹어 시금장이나 딩기장, 딩겨장이라고 하는데, 보리등겨로 만든 깨주매기(보리메주)를 주원료로 해 만든다. 일반된장보다 염도 낮아 옛 시골집의 투박하지만 시큼털털하고 구수한 오묘한 된장맛이 특급 별미다. 시금장은 맛이 시큼해 붙인 이름이다.
깨주매기는 옛날 배고플 때 보릿겨도 아까워서 버리지를 못하고 물에 개어 주물러서 잿불 등으로 구운 것이다. 도너츠처럼 가운데 구멍을 뚫어놓았다.
등겨떡(개떡)이나 등겨빵은 쌀보릿겨를 밀가루에 섞어 당원인 사카리나 설탕을 넣고 쪄서 만든다.
요즘엔 보리등겨를 이용한 건강식품이 많이 나와 있다.
보리쌈장, 새싹등겨장은 물론이고 보리등겨수제비, 등겨장비빔밥, 맥적(돼지고기와 등겨장)도 별미 건강식으로 인기다. 구멍떡도 있다.
쌀겨(등겨)에는 단백질과 필수아미노산, 주름 완화 작용과 보습·미백효과가 있는 각종 기능성 물질이 풍부해 화장품 원료로도 쓰인다.
예로부터 궁중 여인들의 피부 미용에 사용됐다. 기록에는 가마솥 김에 얼굴을 대는 밥김 쐬기, 쌀 뜨물로 세안하기, 쌀겨 주머니를 욕조에 넣은 뒤 목욕하는 방법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 쌀겨에 탁월한 세정 효과가 있는 것이 알려지면서 주방용 세제 제품도 많이 나와 있다.
쌀겨 비누나 세제는 피부 보호는 물론 만성 가려움증이나 아토피성 피부염에도 효과가 있다는 보고서도 있다.
화장품 회사들은 쌀겨의 기능성 물질을 이용한 미용비누, 클렌징폼, 핸드크림, 마스크팩, 샴푸 등 다양한 종류의 제품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등겨 관련 속담도 있다.
‘등겨 먹던 개는 들키고 쌀 먹던 개는 안 들킨다’는 크게 나쁜 짓을 한 사람은 교묘히 빠져 나가고, 사소한 잘못을 한 사람은 들켜서 애매하게 남의 죄까지 뒤집어쓰고 의심받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등겨(또는 겉보리)가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안 한다는 처가살이는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많아 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등겨 먹던 개가 말경(末境)에는 쌀을 먹는다는 처음에 등겨를 먹던 개가 나중에 쌀에까지 눈독을 들이게 된다는 뜻으로, 처음엔 나쁜 짓을 조금씩 하다가 익숙해지면 점점 더 많이 하게 된다는 말이다.
개 등의 등겨를 털어 먹는다는 자기보다 못사는 사람의 것을 빼앗는 경우를 비유한 말이다.
기자의 어릴 때 경험과 광경을 되새김 하면, 방앗간에는 바람을 불어내는 환풍기가 있어 왕겨를 바깥으로 날려서 내보내 수북히 쌓인다.
방아를 다 찧고 나면 쌀과 보리는 집안 어른이 리어카에 싣고 집에 오지만, 왕겨를 챙기는 것은 집안 애들의 몫이었다. 크게 쓸 곳이 없어 가마니에다 대충 쓸어담아서 와도 된다는 뜻이다.
그러는 새 방앗간 주위엔 참새들이 모여 들어 옹기종기 모이를 찾아 먹는다. 노래가락에서도 자주 나오는 '참새와 방앗간' 풍경이 이것이다.
바퀴가 키보다 컸던 방앗간 기계에 칠갑을 한 듯 굵게 묻어 있는 기름때, 기름때 묻은 작업복에다 얼굴마저 시커멓게 기름이 묻은 방앗간집 형의 모습도 추억으로 와닿는다. 왕겨와 등겨가 이어주는 동아줄같은 추억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