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경남뉴스가 '형평운동' 100년을 맞아 연중 기획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른바 백정(白丁) 해방운동이기도 한 '진주 형평운동'은 100년 전 경상 중심지 진주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남아있는 흔적이 많지 않아 학계 등에서는 지금도 자료를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우선 학계의 도움을 받아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만을 소개합니다. 지금은 깊이있게 분석하자는 것이 아닌,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을 기반해 이 운동의 사실적 흔적을 짚으면서 전파하자는데 목적이 있니다. 다행히 지난달 27일 흔적을 찾는 행사가 있어 도움을 받았습니다. 독자들께서 형평운동을 이해할 수 있는 1차 소개분입니다. 언제가는 이를 토대로 더경남뉴스가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연재를 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연재는 '창간 1주년' 연중 기획물이기도 합니다. 많은 애독을 바랍니다. 편집자 주
▶ 형평운동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의 형평(衡平)은 '저울처럼 공평함'을 뜻합니다. 공평이란 공정하게 일하고 공평하게 갖고자 하는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정신이지요. 따라서 형평운동은 불평등하지 않게 대우를 받고 공평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진주의 형평운동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당시 소 도살업을 하던 백정의 신분 해방운동입니다. 당시 최하위 계층인 이들이 자신들의 최소한의 권익을 찾기 위해 '형평사'란모임을 만들어 평등사회 외쳤던, 요즘으로 보면 시민사회운동이었습니다.
백정은 조선시대 도살업, 유기제조업(柳器製造業), 육류판매업 등을 주로 하며 생활하던 천민층이었습니다.
백정은 그의 신분에 맞는 망건도 없고, 가죽신도 못 신고, 명주옷을 못 입는 등 모든 옷차림에서 제약이 따랐습니다.
대인 관계도 마찬가지였지요. 나이 어린 일반인에게까지 존댓말을 써야 하고, 일반인 집에 가서도 머리를 조아리고, 함께 걸을 때는 몇 걸음 뒤쫓아 가는 등 사회적인 차별은 이루 참기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호적에 못 올리거나 좋은 이름자를 쓸 수 없고 결혼, 거주, 장례 등에 이르기까지 백정들이 받았던 차별은 짐승과 별 진배없는 것이었지요.
이는 조선시대에 보편화된 사회관습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조선시대의 꼿꼿한 선비정신으로 서부경남의 정신 지주 역할을 했던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의 '경의(敬義)사상'과 연결돼 있습니다. 또한 근현대에 와서는 한국 재계에서 가장 수평적인 기업으로 평가 받는 LG와 GS의 창업주 기업정신과도 연결돼 있습니다.
▶형평사(衡平社)와 형평운동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이 말은 지금엔 누구나 수긍하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리입니다.
21세기 첨단 시대인 지금은 온갖 SNS나 온라인커뮤니티에서 주의 주장을 하고 토론을 벌이며 정반합을 도출해 내는 집단지성의 시대입니다.
조선시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정해진 신분에 따라 귀천이 완벽히 구별돼 있었습니다. 신분은 직업을 결정하고 배우자를 선택하게 하는 등 일상이 차별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백정이 등장합니다.
백정은 조선시대의 신분 단계에서 가장 천한 집단이었습니다. 한없이 차별 받으며 억압받던 그야말로 천민 중의 상천민이었습니다. 남들처럼 같거나 비슷한 대우를 받는 것이 그 얼마나 큰 소망이자 희망이었겠습니까?
이들이 일어났던 겁니다. 이들이 만든 단체가 형평사(衡平社)였고, 분출된 신분해방 열기는 들불처럼 대단했습니다.
형평사(衡平社)는 저울 형(衡), 평평할 평(平), 모일사(社)로 말 그대로 '저울처럼 공평한 사회를 만들고자 모인 단체였지요. 1923년 봄 경남 진주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진주는 전국 주요 도시였지요. 지방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대부분이 진주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도시였습니다.
형평사는 일제 강점기에 천민 계급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조직된 정치적 결사입니다. 일본의 수평사 운동에 영향을 받아 1923년 경남 진주에서 결성되어 형평 운동을 주도했으며 일본 관헌의 탄압으로 1936년에 대동사(大同社)로 명칭을 변경하고 피혁 회사를 차려 복리를 도모했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대대로 이어진 백정 차별의 관습을 없애고 평등사회를 만들겠다는 일념에서 행해졌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자발 참여해 형평사란 거대 단체가 만들어졌습니다.
첫째 목적은 백정들에 대한 차별 대우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삶의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 평등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었지요.
▶시작된 신분해방운동
형평운동은 조선시대 신분제를 깨부수겠다는 행동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백정 신분해방운동이었습니다. 1923년 4월 24일 진주에서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이틑날인 25일 진주에서 백정의 신분으로 자산가가 된 이학찬(李學贊)이 백정에 대한 교육 차별에 분개해 신현수(申鉉壽·양반), 강상호(姜相鎬·양반), 천석구(千錫九·양반), 장지필(張志弼·백정) 등과 진주 대안동(大安洞)에서 회원 80여 명과 더불어 창립총회를 열어 형평사를 설립, 탄생합니다.
임시의장 강상호의 사회로 형평사 취지서와 사칙(社則)이 채택됩니다.
이어 역원 선거로 들어가 위원(중앙집행위원)에 강상호·신현수·천석구·장지필·이학찬, 간사에 하금석(河金石)·박호득(朴好得), 이사에 하윤조(河允祚) 등 7명, 재무에 정찬조(鄭贊祚), 서기에 장지문(張志文)이 각각 뽑혔습니다.
그리고 형평사의 유지방침, 교육기관의 설치, 그리고 회관(會館) 설치, 각지로의 취지선전, 형평사 창립을 신문지상에 발표할 것 등이 결의됩니다.
당시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진주 재주의 백정동포가 궐기해 형평사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계급 타파 운동을 시작하려고 한다. 이는 말할 나위도 없이 시대에 적합한 행동으로 생각된다. 운동으로의 철저한 노력을 백정동포에게 바란다”라고 격려·지지 했습니다.
이는 신분 질서가 엄격한 조선 5백년에 가장 천대 받아온 백정 집단의 인권 존중과 신분 해방을 주창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형평운동은 전통사회에 불평등한 질서를 청산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하는 근대 사회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일어난 자연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당시에 우리 신문이나 관련 글에 따르면 흔히 농민, 형평, 청년, 여성 순으로 적으면서 형평운동의 위상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진주 지역은 유교 전통이 강해 백정 차별이 더 심했으리라고 짐작할 수는 있어도, 그런 유교 분위기가 다른 지역에도 강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백정 차별이 진주만의 특성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기질입니다. 불의에 못 참는 지역 성정에서 답을 찾는 것이 나은 방법입니다. 요즘도 진주 사람들은 고집이 다른 지역에 비해 남다르다고 합니다. 고집에는 다소 과한 부분이 있다는 평가를 받지만 의(義), 즉 옳은 것에 기준을 삼으려는 지역의 기질입니다. 요즘 말로는 의리라고 하지요.
연결이 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전국에서 가장 옛것을 잘 지키고 있는 지역이 진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북 안동, 경주 등 여러 지역이 그 지역 특유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내면을 살펴보면 진주만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같은 서부경남(부산을 중심)임에도 마산(창원)과 비교해도 더 올곧습니다.
전국에 지역 사투리를 가장 만힝 남아 있는 곳이 진주하고 합니다. 경북 안동도, 전남 광주도 아니라고 합니다. 혹자는 같은 지역인 부산과 창원 등이 공업화로 전래 전통이 외지인에 의해 허물어졌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대쪽같은 정신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남명 조식 선생이 같은 유학자인 이황 선생을 들어 "빗자루를 들고 마당도 쓸 줄 모르는 선비"라고 일갈한 데에서 확인이 되지요. 겉멋과 형식을 떨친 참 유학자의 기풍입니다. 남명 선생은 중앙 관직도 마다하고 오로지 지역의 유생 교육에 힘썼습니다.
이런 남명 선생의 고고함에 임진왜란 때 재야의 남명학파 후학들이 의병을 일으켜 엄청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요즘엔 지수를 중심으로 진주정신을 찾자는 운동이 진주시를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진주 지수에서 나고 자란 LG와 GS 창업자와 후계 기업인들이 독립자금을 댄 일화 모든 것이 남명 정신과 연결돼 있습니다. 너무 고무적인 상황입니다.
1910년 경남의 경우 동래, 창원, 의령, 거창, 밀양, 울산 등지의 도축 수가 진주보다 많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자의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차피 진주를 비롯한 이들 지역이 소 사육 두수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었지요. 이들 지역과 비교해 굳이 신분해방운동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된다는 말이지요. 기본적인 베이스란 말입니다.
여기에다가 다른 여러 사항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형평운동 발생 조건은 이러한 진주 지역의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고, 재조명돼야 할 것입니다.
▶형평사의 변화
형평사는 일제 침략 35년 동안 단일 조직으로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사회운동 단체이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인간 평등을 주장하며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관습을 없애려고 활동한 인권단체로 평가됩니다.
이 운동은 훗날 1935년 이름을 '대동사'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한 시기를 제외하고 형평사 활동기간(1923∼1935년)만 하더라도 형평 운동은 이 시기의 어떤 사회운동보다 가장 오랫동안 단일 조직아래 지속됐습니다.
그 과정에는 억눌린 민족 상황이 뒤얽혀 작용했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만들려는 의지가 담겨 있어 더욱 뜻깊은 운동이었지요.
▶형평운동의 의의/ <조선형평운동 포스터>
일각에서는 형평운동을 ▲백정의 계급적인 해방투쟁 ▲민족적인 해방투쟁의 두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기자는 이 분류에 동의를 하진 않습니다만 일단 짚어봅니다.
여러 군데서 분석한 내용을 따라가 봅니다.
백정은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에 의해 법제상으로는 해방됐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봉건적인 지배 관계를 유지시키려는 정책을 펴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이력서 등에 반드시 신분을 명기하도록 했습니다.
때문에 당시 백정은 자신의 신분을 호적상 '도한(屠漢)'으로 기재하든지 붉은 점(赤點)으로 표시했습니다.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그대로 존속됐습니다.
당시 형평사 통계에 따르면 전국의 백정의 수는 40여 만명이었고, 조선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3만 3712명이었다고 합니다. 주로 삼남 지방에 집중돼 있었다고 합니다. 전국의 소싸움(소힘겨루기) 경기가 남쪽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들의 일부는 농업에 종사했지만 대부분은 본업이라 할 수 있는 도살업, 제혁(製革), 유세공(柳細工) 등에 종사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1926년 형평사의 명의로 총독부에 제출한 요망서에는 ①일반인에 의한 차별과 박해가 심한 것 ②관공리·교원이 차별 대우하는 것 ③목욕탕·이발소·요리점 등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차별이 행해지고 있는 것 등을 지적하고, 취체(取締·법령, 명령 따위를 지키도록 통제)를 법제화할 것을 요망했습니다.
▶형평사의 조직과 분열
형평사는 이러한 백정들의 신분 불만을 조직을 통해 구체화 했습니다.
형평사 창립 후의 형평운동은 당시의 진보 사회운동단체의 지원을 받아 불과 1년 사이 각도에 형평사 지사·분사가 설립됩니다.
이러한 형평운동의 급격한 발전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가져왔습니다. 1923년 5월 진주에서 우육비매동맹(牛肉非買同盟)이 조직되었고 7월에는 경남도 합천 삼가(三嘉)에서, 8월에는 김해와 충북 제천에서 반형평운동(反衡平運動)이 일어납니다.
이어 같은 해 11월 7일 대전에서 최초의 형평사 전국대표자대회가 열려 형평사 본사를 진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한다는 사항이 결의됐습니다. 진주가 너무 남쪽에 치우쳐져 전국적인 조직을 끌기엔 다소 부족하는 것이 이유였지요.
이를 두고 이듬해인 1924년 2월 10·11일 부산에서 개최된 형평사 전국임시총회에서 본사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형평사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 돼 남북 양파로 갈리게 됩니다.
남파(南派)는 경상도에 지지 기반을 둔 강상호·신현수 등 보수파이고, 북파(北派)는 전라도·충청도·강원도에 기반을 둔 장지필·오성완(吳成完) 등 혁신파였습니다.
혁신파는 부산대회 직후인 2월 13일 대전에서 형평사 혁신동맹준비회를 조직했습니다.
이어 3월 12일 충남 천안에서 혁신동맹창립총회를 열어 본사의 서울로의 이전과 잡지 '형평' 발간, 피혁(皮革)공장 설립 등을 결의합니다.
이ㅔ 맞서 강상호 등 보수파도 4월 24·25일 진주에서 전국형평사대회를 열어 세를 과시했지요.
불행하게도 형평사는 창립 후 불과 1년 만에 분열되고 맙니다.
이후 양파의 반목과 대립을 우려한 유지들에 의해 5월 21일 남북협의회가 열리고, 7월엔 양파 간부들의 간담회가 열려 형평사 통일에 대한 토의가 논의됐지요
그 결과 8월 15일 대전에서 형평사통일대회가 개최돼 남북 양파의 대표자인 장지필과 강상호가 퇴진되고 형평사의 명칭을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로 고치고 본부를 서울에 설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양파 사이에 암암리의 내분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형평사의 사회주의화
형평사는 1923∼1924년 새로운 사회운동 단체(조선노농총동맹·조선청년총동맹 등)가 탄생하면서 이들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또 이들 단체와 제휴도 이뤄집니다. 아무래도 하층 빈민층의 모임이기에 태생적인 한계로 사회주의 노선이 더 가까워졌겠지요.
이와 더불어 형평사와 형평운동 조직의 통일 노력이 급진전 되면서 1925년 4월 24·25일에 열린 제3회 전국대회에서 조직이 통일되고 조직과 운동은 더욱 확대되고 가열차집니다.
각지에 형평청년회가 조직되고 12월에는 중앙기관으로 형평사청년총연맹이 탄생합니다. 또 자녀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형평학우회도 조직돼 각지에 권학단(勸學團)도 파견했습니다.
이때 1925년 8월 형평운동을 꼽갑게 보던 조직이 경북도 예천형평분사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형평사 본부는 긴급회의를 열어 전국의 형평사원이 예천으로 총출동 할 것을 결의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각 사회운동단체(화성회·조선청년총동맹 등)에서도 독자적으로 조사단을 파견해 형평운동을 적극 지원했지요.
조사 결과 사건은 이 지역의 청년회원이 주동이 되어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고, 이들의 사죄로 사건은 일단락됐습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의 진보적인 여러 사회운동단체와 형평운동과의 제휴는 더욱 강화됐습니다.
아래 각지의 형평청년회는 조선청년총동맹에 속속 가입 또는 제휴하고 이러한 경향은 1926년에 들어가 더욱 도드라졌습니다.
1926년 연두에 장지필이 새해의 계획으로 조직의 확충 강화와 무산운동(無産運動)으로의 진출을 선언한 것은 이러한 정세의 반영이었지요.
또 형평사총본부도 벌써 같은 해 정월에 화요회(火曜會) 중심의 4단체 합동위원회 주최 재경(在京)사상단체신년간담회에 참가해 구체적인 제1보를 내딛게 됐습니다.
4월에 열린 형평사 제4회 대회에서도 무저항주의의 일소를 가결해 사회운동단체와의 적극적인 제휴 아래 실천운동에 나설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후 각종 파업·소작쟁의 등에 참여하는 등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더불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그 결과 이 시기 형평사의 조직은 다른 사회운동단체와의 제휴 아래 크게 확장되어갑니다.
한편 1926년 9월 임시대회에서는 사회주의운동의 분파투쟁의 영향으로 미증유의 내부 혼란을 겪습니다.
1927년 1월 일어난 고려혁명당사건(高麗革命黨事件)에는 장지필·서광훈(徐光勳) 등 중앙 간부가 연좌되면서 이후의 형평운동에 급진파·온건파의 대립으로 격화됩니다.
형평사 조직은 이후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같이 해체되고 맙니다.
이상과 같이 형평운동은 백정들의 자기해방운동인 동시에 일제식민지 치하에 있어 다른 사회운동단체와의 제휴 아래 민족해방운동의 일익도 담당하는 중요한 구실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