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알고주알 어원이 흥미롭습니다. 미주알은 '창자의 끝 항문'을 뜻하는데, 미주알고주알은 '미주알'에 '고주알'을 합친 말입니다. 어문학계는 고주알이 미주알과 운을 맞추기 위해 덧붙인 말로 해석합니다. 창자 밑구멍의 끝인 미주알은 '눈으로 보기 어려워 숨은 사소한 일까지 속속들이 말하거나 캐묻는 것'을 뜻합니다. 더경남뉴스 기자들이 숨은 기삿거리를 찾아 '사랑방 이야기식'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더경남뉴스 편집인입니다. 중앙일간지에 논설위원을 거쳤습니다. 기자들이 올린 기사 내용에서 잘못된 단어나 미흡한 문장을 고쳐 독자들에게 내놓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신문사에선 이를 "데스킹(Desking)을 본다(한다)"고 합니다.

굳이 지난 이력을 밝히는 이유는 젊은 세대의 글 이해력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글 이해력이란 근자에 '사흘(3일)' 등으로 몇 번 논란이 됐던 문해력(文解力·문장의 해석 능력)을 말합니다.

정월대보름인 12일 새벽 진주에 많은 눈이 내렸다. 진성면 구천마을 한 주민이 눈 쌓인 마을 도로를 걷고 있다. 좋은 날 내린 상서로운 서설(瑞雪)이다. 정창현 기자

기자가 경험한 사례 몇 개를 소개합니다.

어제(12일) 새벽에 경남 진주에 눈이 많이 왔습니다. 이날은 전통 민속일인 정월대보름이었습니다. 오곡밥을 짓고 부럼을 깨 먹으면서, 액운을 떨치고 복을 비는 날이지요.

더경남뉴스의 한 기자가 새벽같이 부지런을 떨어 눈 내린 정경 사진들과 함께 기사를 작성해 올렸더군요. 진주에선 눈이 잘 내리지 않아 작지 않은 뉴스입니다. 크고 작은 사고도 날 수 있어 뉴스로 전달하는 기자로선 종일 주시해야 합니다.

정월대보름에 눈 내린 스케치 기사여서 초고(첫 원고)에다 '서설(瑞雪)'이란 낱말을 넣고 싶더군요. 서설을 풀이 하면 상서로울 서(瑞), 눈 설(雪)입니다. 상서로운 눈입니다.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불현듯 젊은층에서 서설이란 단어의 뜻을 알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많은 젊은이가 모를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넣는 게 낫겠다고 판단해 넣었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고민은 이어졌습니다.

'상서로운'의 뜻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이 단어를 거의 쓰지 않아 서설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란 판단이 들었습니다.

상서(祥瑞)롭다는 상서로울 상(祥), 상서로울 서(瑞)로 '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조짐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해당 기사에서는 '서설(瑞雪·상서로운 눈)'로 쓰고, '상서롭다'의 설명은 붙이지 않았습니다. 문장상 '좋은 눈'이란 느낌이 있기에 독자가 어련히 알아서 판단할까란 생각이었습니다. 단어의 뜻이 더 궁금하다면 독자가 단어집에서 찾아볼 것이라는 짐작도 했습니다.

한 해의 복을 비는 정월대보름인데 설마 거꾸로 '서러운 눈'으로 해석하진 않았겠지요. 노파심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해당 기사는 송고됐습니다.

모두를 설명하면 너무 길고 많다고 판단해 혼란스럽지 않게 하려는 중간쯤의 타협이었습니다. 지엽적인 단어의 설명이 길면 내용의 주와 객이 바뀌어 좋지 않은 문장이 됩니다.

또 다른 사례도 있었습니다.

먼 집안 30대 조카가 더경남뉴스의 기사 몇 개를 읽은 뒤 A 기사는 어렵고, B 기사는 헷갈리고, C 기사를 두고선 "잘 썼다"라고 하더군요.

해당 기사들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뒤통수를 맞은 듯했습니다.

A 기사는 내용이 다소 어려운 농업 분야의 보도자료이고, B 기사는 제가 쓴 세시풍속 기사이고, C 기사는 어려운 단어가 거의 없는 일반 보도자료 내용입니다. 물론 데스킹을 다 거쳐 나간 기사입니다.

"아하, 젊은층은 단순한 글을 잘 된 문장이라고 보는구나"

한글 세대의 '좋은 글, 잘된 글 기준'은 달랐습니다. 동영상 '숏폼'이 인기를 끄는 것과도 연관성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기자는 여태껏(지금껏) 글을 써오면서 쉬운 글이어야 한다는 기본 생각은 변함없이 갖고 있었지만, 조카와 같은 기준과 비슷한 세류(世流·세상 분위기 흐름)를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습니다.

글은 다소간에 품격도 있고 감칠맛도 내야 전달력이 강해진다는 생각이었지요. 언제부터인지 기억엔 없지만 이 틀에 갖혔던 것 같습니다.

글 쓰는 구력이 쌓여가면서 미사여구를 더 넣고, 고운 말이라며 굳이 찾아서 넣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글 폼을 위해서였습니다.

글쟁이들 간에는 우스개로 '(글)장난 친다'는 말을 합니다. 낱말 하나를 적당한 곳에 잘 넣으면 글 분위기가 살아 읽는 맛이 납니다. 근사한 글이 되는 것이지요. 글을 쓴 이로선 자기만족에 푹 빠질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자도 이 틀에 들어 있습니다.

달리,

신문사에 신입 기자가 들어와 기사 쓰는 법을 가르칠 때 무조건 쉬운 단어를 써라는 엄명을 내립니다. 초짜 기자들이 기자 냄새가 풍길 때까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게 "중학교 1~2년생이 읽어 이해하지 못하는 기사는 질 나쁜 기사"란 말입니다.

이를 벗어나면 잘못된 글이라고 호되게 야단을 맞습니다. 기자도 소싯적에 이렇게 혹독하게 배웠습니다.

선배들의 이 말 내면엔 '너도 모르고 썼는데 독자인들 이해하겠냐'는 강한 질책이 담겼습니다. 하루 몇 번의 기사 마감 때마다 듣자니 한편으론 억울함도 없지 않지요. 마감 시간에 쫓겨 이것 저것 다 챙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감 시간이 임박하면 긴장해 머리가 하얘지는 게 기자의 일상입니다. 그나마 부장(데스크)이 멋지게 고쳐 놓으면 고마움과 함께 안도의 한숨도 절로 나옵니다. 달리 자존심(감)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글은 쉽게 쓰는 게 최고의 글입니다. 제가 후배 기자들에게 하는 말, "글 쓰듯 쓰지 말고, 말하듯 써라"입니다. 가능하면 문어체로 쓰지 말고, 구어체로 쓰란 뜻입니다.

각설하고,

잘 쓰고 싶은 게 글입니다.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워 그렇지, 돈을 많이 벌고픈 욕심보다 더한 게 글 욕심입니다.

좋은 단어, 특이한 단어를 문장에 넣어야 직성(直星·타고난 성질)이 풀리고, 만족을 하는 게 글입니다. 글의 유혹이지요. 읽는 독자도 단어와 문장 구사력에 현혹되면 감탄사를 내뱉습니다.

기자도 부장을 하고, 국장과 논설위원을 거치면서 단어 구사력이 더해지며 부지불식간에 '장난'을 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여기에서의 장난이란 글 중간 중간에 테크닉(기술)을 구사한다는 것으로, 감칠맛 나는 단어와 문장을 끼워넣는 것을 말합니다.

밋밋한 단어와 문구만 계속 나열되면 글을 쓰는 재미가 덜하기도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글이 나쁘지 않다는 말을 더러 들었습니다.

조카에게서 받은 '좋은 글 충격'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다 된 글(기사)을 퇴고하며 입맛을 다시며 뿌듯해 하지만, 정녕 많은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짜증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한글 세대의 문해력(문장의 해석 능력)을 차치하고라도, 자신의 실리를 중요시하고 따지는 젊은층에겐 매우 불만족스러운 글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만 어느 쪽을 택할 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에 기준을 잡기가 참으로 애매합니다. 글 쓰는 기자의 숙명과도 같은 고민입니다.

다시 돌아가,

앞에서 거론한, 눈 내린 서설 기사와 관련해서는 '정월대보름에 풍속을 축하라도 하듯 서설(瑞雪·상서로운 눈)이 내려 소복이 쌓였다'로 쓰는 게 좋다는 개인 생각입니다. 대보름에 내린 눈이 보통 때의 눈과 느낌이 다르고, 또한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단어마다 설명을 길게 곁들여야 할 상황에 부닥치면, 문장과 적당히 타협을 봐야 합니다. 글의 중심(본질)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독자가 눈대중으로 함축된 뜻을 인지하게 설명한다는 말입니다.

'과례는 비례'(과한 예의는 예의가 아니다)란 말에 충실하는 한편으로, 너무 부족하지도 않게 설명하는 것이지요.

진짜 문제는 이도 저도 아닌, 앞서 언급한 기자가 단어의 뜻을 소화하지 못하고 기사를 작성하는 경우입니다. 기사에서 이런 사례는 허다합니다. 짧은 설명마저 하지 않으면 독자도 해당 기자처럼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넘깁니다.

조금 다른 예를 하나 듭니다.

11년 전인 2014년 4월, 전남 진도군 관매도 해상에서 299명이 숨진 세월호 침몰 사고 때 신문 지상에 '생때같은 자식' 문구가 자주 등장했습니다.

처음엔 각 신문사의 논설위원 등 고수 기자들이 썼는데, 서서히 일반화 하면서 일반 기자도 많이 사용하게 되었지요.

생때같다는 '아무 탈 없이 멀쩡하다'는 뜻입니다. 고운 우리말인데 슬픔의 글에 더 많이 인용됩니다.

혹자는 이 단어를 '귀한', '공부 잘 한' 등으로 넘겨짚을 수 있습니다. 이는 '아무 탈 없이 멀쩡하다'와 전혀 관련 없습니다.

이처럼 헷갈릴 수 있는데도 '생때같은' 낱말을 쓴 기사들엔 설명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설명을 붙이는 순간 폼나게 쓰려던 '생때같은'의 단어 값어치가 뚝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설명을 해버리면 평범한 단어 '멀쩡하던'보다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지요.

짐작컨대 당시 이 단어를 구사한 대다수의 기자는 '생때같은'의 뜻을 알고 있었겠지만 설명은 썩 내키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독자는 '귀한' 등으로 엉뚱하게 해석했을 것으로 추론해 봅니다.

글을 쓰다 보면 이런 경우가 종종 나옵니다.

'생때같은' 단어처럼 사용하면 글 폼이 잡히는 단어군은 있습니다.

논설위원들의 글에서 종종 등장하는 '기시감(旣視感·경험한 적이 없는 것이 경험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 '엄혹(嚴酷)한(매우 엄하고 모진)', '비루(鄙陋)한(행동이나 성질이 너절하고 더러운)' 등의 단어가 이에 속합니다.

매우 어려운 단어인데 차용하면 왠지 폼이 납니다.

논설위원의 글은 일반 기자의 글에 비해 격을 더 갖추는 편이라 어려운 단어가 나와도 독자가 받아들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들의 글엔 많은 경험에서 나오는 품격을 갖춘 글은 많습니다.

두루두루 길게 쓴 글 마무리를 합니다.

기사에서 설명을 넣으면 글이 길어져 여의치 않으면 글의 맨 밑에 '단어 풀이'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제안을 합니다. 너무 많을 수 있어 제한적으로 하자는 의견입니다.

아직 언론 매체에서 이런 틀을 정식으로 도입한 곳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이를 시행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부실한 어휘력이 드러난다는 자의식, 즉 심리적인 요인이 작용하는 게 아닐까 하는 작은 생각도 해봅니다. 이는 앞에서 거론했듯이 '중학생급 독자'를 염두에 두면 '인색함'이 금방 사라집니다.

어려운 경제 용어엔 기사의 맨 마지막에 이 틀을 공식처럼 구사합니다. 경제 용어가 더 어렵기 때문이라고요? 세시풍속 등에서 등장하는 낱말도 매우 어렵습니다.